/ 독도소유권에 관한 우리나라 증거, 과연 타당한가

독도소유권에 관한 우리나라 증거, 과연 타당한가

  • #16663

    이런 의문을 가지게된 것은 19세기이전의 우리나라 고지도, 고문서중 독도라고 특정할수 있는 것은 그나마 장한상사적이 유일하다는 겁니다.

    그에 반해 일본은 17세기 이후로 꾸준하게 독도를 인지해왔었죠.

    일본측 자료에 독도를 우리나라영토로 인지하고 있는 자료가 다수 있다곤 하더라도  그것이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순있어도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증거가 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토의 소유권은 타국의 인식으로 생기는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나라가 우리나라땅으로 인식하고 행정권을 발해야하는데 그런 기록이 극히 빈약합니다.

     

    19세기이후 근현대의 기록은 더 암울하더군요.

    대일강화조약과정에서 정부와 대사관의 대처는 코미디를 보는것 같았어요.

     

    일련의 과정들을 보니 우리나라가 ICJ(국제사법재판소)행에 동의하지 않는것도 이해가 가더군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16664

    KM

    논란이 없는 것과 특정할 수 없는 것은 다릅니다.  국내 고문서는 과거 독도와 울릉도의 명칭이 정립되어 있지 않는 등 불명확한 행정 체계, 독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약간의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독도’라는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뿐이지 위치상, 정황상으로 독도를 가르킨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고 보입니다.

    유명한 세종실록지리지를 들면,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릉도=울릉도라는 사실은 이견이 없는 부분이고, 울릉도 주변의 섬 중 날씨가 맑을 때만 볼 수 있는 섬은 독도밖에 없습니다. 충분히 독도라고 특정할 수 있는 기록인 것입니다.

    또한,  영토의 소유권이 타국의 인식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부분의 근거를 묻고 싶습니다. 당장 대한민국 헌법은 현 휴전선 이북 영토의 소유권은 대한민국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 따라 대한민국도 실질적으로는 휴전선 이북에 대해 어떠한 행정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하여,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사이의 영토 분쟁 사건에 대하여 ICJ가 자국의 영토에서 누락시킨 지도의 증명력보다 타국의 영토로 표시한 지도의 증명력을 더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근현대의 기록은 암울할수밖에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의 조선은 근대적/수평적 외교방식을 접한 지 한 세기도 되지 않았고, 그 국력 또한 미약했기에 어떠한 합리적인 대체를 실행할 여력이 없었으며, 대일강화조약 당시에 정부와 대사관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 즉 일본 그 자체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일본과 연합군 사이의 조약인 대일강화조약에 대처할 수도, 대처할 일도 없었습니다. 

  • #16667

    Km님 국내 고문서의 내용이 위치,정황상 독도를 지칭할수 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저는 의문입니다.

     

    세종실록을 예로 들어주셨는데 세종실록  또한 독도인지를 주장하기에는 그 문장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우산.무릉은 두 섬으로 이 현(울진현) 정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의 거리는 서로 멀지 않고 바람이 불고 청명하면 볼수 있다.

     

    1. 우산 무릉의 우산이 독도를 가리키는것인지 죽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방위표시나 거리표시도 없고 섬의 생김새도 특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다른 사료로 우산을 추정해야 하는데 고지도를 보았을때 우산의 위치는 대부분  지금의 죽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는 울릉도 서쪽에 우산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19세기까지 꾸준하고 반면에 일본은 17세기 무렵부터 독도의 위치와 모양을 비교적 정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문헌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고려사지리지는 본문에서 일도설을 얘기하다가 혹은 두섬이라고도 한다고 얘기합니다.

    태종실록에서 얘기하는 우산은 명백히 독도가 아닙니다.

    세종실록은 이도설을 얘기합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도설을 얘기하다가 일도라는 얘기도 있다고 하죠.

    한번만 울릉도에 가봤어도 이도니 일도니 말이 나올리가 없잖아요.

    당시 조선정부는 우산인지 무릉인지 일도인지 이도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지도고 문헌이고 그렇게 엉망인거죠.

     

    영토의 주권은 타국의 인식으로 생기는것이 아니라는 것은 국제법에 근거해서 얘기한것입니다.

    국제법상 인정되는 자국영토획득의 권원중 가장 강력한것은 해당 지역의 행정권의 유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정권은 징세권, 형벌권, 면허권등을 얘기합니다.

    이런 행정권을 발하려면 해당 지역을 인지하고 자국의 관할하에 두는 귀속조치가 필요합니다.

    타국이 저땅은 A나라 땅이라고 인지했다고 하여 A나라 땅이 되는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말레이시아분쟁의 요지는 실효적지배가 인정되는가가 중요논점이었습니다.

    그 요소중 하나로 말레이시아의 지도가 인정된것이죠.

    ICJ는 기본적으로 조약에 첨부된 지도를 제외고는 고지도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조약의 문언을 중점으로 다루고 고지도는 해석의 보충적수단으로만 인정합니다.

    말레이시아의 지도는 1970년 경도와 위도가 표기된 현대지도이고 공인지도였습니다.

    반면에 일본측 지도는 과거 고지도에서 독도를 우리나라영토로 분류한 듯한 몇개의 지도가 있지만 시마네현고시를 전후로 독도에 관해서는 일관된 모습을 보입니다.

     

    대일강화조약 당시에 정부와 대사관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 즉 일본 그 자체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일본과 연합군 사이의 조약인 대일강화조약에 대처할 수도, 대처할 일도 없었습니다. 

    이말은 이상하네요. 대일강화조약 당시는 이미 주권을 회복한 상태입니다.

    헌법에 기초한 정부, 의회, 사법권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강력하게 개입했습니다. 처음엔 대마도가 우리땅이라고 우겼죠.

    하지만 일본측 증거에 박살나고 그 이후에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에도시대부터의 조업권, 고지도, 시마네현고시를 비롯한 정부문서를 증거로 내민 일본에 비해 우리측 정부,대사관직원은 독도위치도 정확히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이런게 코메디라는 겁니다.

     

     

     

     

     

     

     

  • #16669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기 전의 역사적 증거는 어차피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은 잘못하고 있습니다.

  • #16670

    패전하기 전에 독도가 한국의 영토인지 일본의 영토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 #16674

    Liberabit님 일본이 패전하기전의 역사적증거의 증명력을 부정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 기준을 패전일로 상정한 이유가 있나요?

     

     

  • #16675

    역사적인 증거가 전혀 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영토는 그 시대에 영향을 끼치는 조약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2. 땅을 순순히 내줄 리 없으니, 전쟁을 하여 조약을 강요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과거의 소유권을 주장해도 전혀 먹힐 수 없는 것입니다.

    패전일로 상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연합국이 일본 제국을 상대로 승리하였으며, 이때의 조약만이 현재 영향을 끼치고 있음.

  • #16676

    토론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말합니다.

    대한민국이 (자신이 옳다고 외치지만) 국제 사법 재판소에 가는 것을 피하는 이유는 뒤가 구려서일 것입니다. 독도가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쨋든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억지로라도 영토를 지키려고 기를 쓰고 노력하는 애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 #16677

    Liberabit님 조약은 영토를 획정하는 여러가지 방법중 하나일뿐입니다.

    국제법상 인정되는 영토획정행위는 선점, 정복, 첨부, 할양등이 있고 조약으로 인한 영토획정은 할양에 속합니다.

    우리나라는 독도문제에 있어서 과거로부터의 본원적권리를 주장하고 있고 그 근거로서 고지도, 고문헌에 대한 연구는 필수입니다.

    다만 그 과거의 자료가 명확하거나 일관되지 못하여 증거로서 증명력을 주장하기에는 빈약하다는 것이 제 글의 요지입니다.

     

    패전일로 상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연합국이 일본 제국을 상대로 승리하였으며, 이때의 조약만이 현재 영향을 끼치고 있음.

     

    위와같은 이유라면 대일강화조약 발효시점인 1952.4.28로 기준을 잡아야 할겁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 이전기록이 모두 의미없다고 말하는건 동의하기 어렵네요.

    대일강화조약에서 일본이 반환하는 도서에 독도가 포함되는지에 관해서는 명시적규정이 없으므로 향후 문제전개를 위해서도 과거 자료연구는 중요합니다.

     

    ※ 독도얘기하는데 애국심은 왜나오나요?

    저는 옳고 그름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Liberabit님은 니편 내편에 대한 얘기를 꺼내시네요.

  • #16678

    Liberabit님 우리나라가 ICJ에 동의하지 않는것이 뒤가 구려서라고 하셨는데 저랑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신것 같은데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실수 있나요?

     

    독도가 명시되지 않아서 그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대일강화조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확하게 이해가 잘 안됩니다.ㅠㅠ

  • #16679

    #주야

    독도 주제는 아주 오랜만에 봐서 아주 신선하네요. 다시 한 번 독도에 대해 공부하는 셈 치고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온 무릉과 우산에 대해서 주야님의 의견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만약, 우산이 죽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면 뒤에 이어 나온 말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죽도는 울릉도에서 약 2km 정도 밖에 안 떨어져 있고 바다에서 2km인 것은 장애물이 없어 도시와는 틀리게 충분히 가까운 거리입니다. 즉, 뒤에 나온 바람이 불고 청명하면 볼 수 있다라는 것은 바람이 없거나 청명하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라는 뜻과 마찬가지인데 죽도의 경우 울릉도에서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껴 있을 경우에도 충분히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합니다.

     

    또한, 조선 후기에 박세당이 쓴 ‘서계잡록’에 실려있는 글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대개 두 섬(울릉도와 우산도)이 그다지 멀지 않아 한번 큰 바람이 불면 닿을 수 있는 정도다.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매우 맑지 않거나 최고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보이지 않는다(不因海氣極淸朗, 不登最高頂, 則不可見).”

     

    죽도라고 한다면 날씨가 매우 맑지 않거나 최고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라고 표현할 리 없겠지요.

    이미 독도를 죽도와는 별개의 섬으로 옛날부터 인지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주야님이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영토획득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해당지역을 인지하고 자국의 관할 하에 두는 귀속조치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대한제국은 1900년에 10월 25일에 칙령 41호에서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이에 울릉도에 석도를  포함시켰습니다. 이 석도가 바로 독도입니다. 석도가 독도라는 증거가 없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던데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부르던 말이 독섬, 돌섬의 사투리입니다. 그리고 만약 대한제국 정부에서 독도를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면 왜 1906년 3월 28일에 독도를 시네마현으로 편입한다고 울도군수에게 통보했을 때 어떻게 바로 중앙정부로 보고를 하고 항의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일본은 대일강화조약 이전 대장성령 4호(1951. 2.13), 총리부령 제24호(1051. 6. 6.) 등에서 독도를 다케노시마로 일컬으면서 일본 행정권 외 지역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약 발효 후인 1952년 8월 5일 대장성령 99호도 독도를 행정권 외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일강화조약 전에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1946년에 내린 SCAPIN-667이라는 지령에 보면 쿠릴 제도, 소쿠릴 제도를 포함해 리앙쿠르 암-이게 독도지요-이 일본국 이외의 지역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총사령부는 이 지령을 바탕으로 지도 ‘SCAP 관할구역 일본 및 남조선’을 작성하고 섬’TAKE’를 남조선 구역으로 포함시켰지요. 타국이 이 땅은 A의 것이라고 한다고 해서 영토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이 시기 일본은 패전국으로서 자신의 영토를 단독으로 정할 수 없고 대한민국은 이 시기에 군정이 실시되고 있었으니 연합국이 정의한 대로 독도는 남조선 즉, 대한민국의 지역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때 SCAPIN-667은 청일전쟁 이전의 영토를 기준으로 했으니 정확하게 명시된 자료가 거의 없으나-진짜 없었는지 일본이 식민지배를 하면서 없앤건지- 독도가 조선의 구역이었다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대일강화조약에서 왜 독도가 빠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비망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대일강화조약의 초안 작성은 미국과 영국 두 나라가 따로 진행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독도에 대해서 미국과 영국의 견해가 달랐습니다. 미국같은 경우에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독도를 일본 외 지역으로 봤다가 1949년 12월 29일 중간 초안에 일본에 속한 것으로 명시되고 1951년 3월 23일에 독도 명칭이 아예 빠진채로 공식초안이 확정됩니다.

     

    영국과 같은 경우에는 1951년 2월 28일 1차 초안에는 독도를 일본 도서로 규정되었다가 이후 초안에는 일본 외로 규정되지요.

     

    어쨋든 미 영 두 나라는 1951년 4월 25일에 각자의 초안을 가지고 공동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협의를 시작합니다. 독도 뿐만이 아니고 제주도도 사실 문제가 되었었지요. 영국은 전략적인 이유로 제주도를 일본 영토로 하자고 했었습니다. 주야님이 말씀하셨던 주미 한국대사(양윤찬)와 대사관 직원이 독도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고 다케시마 암 인근이라고 답한 사건도 이 시기에 발생한 것이지요. 더군다나 양운찬 대사가 독도 및 파랑도의 영유권을 요청하면서 말이지요. 영유권을 요청하면서 그 위치도 잘 알지 않고 갔다는게 참…

     

    그런데 이 얘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러한 한국대사관의 답변에 어이가 없던 미국 국무부는 주한 미국대사인 무치오에게 문의해서 독도가 리앙쿠르 암임을 1951년 8월 8일에 확인함과 동시에 일본이 총사령부에 제출한 ‘일본 본토 주변에 인접한 여러 작은 섬’이라는 책자에서 일본 외무성이 기술한 ‘리앙쿠르 암에는 조선명칭이 없다’라는 것이 허위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미 늦어진 공동초안 발표를 위해 독도 문제를 미결로 함과 동시에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되었지요. 대한민국이 독도 문제에 대해 외무부 장관 변영태가 보낸 서한은 9월 21일이었습니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요.

     

    강화조약과 관련된 비망록에 보면 독도가 추후 영유권의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은 초안을 작성하던 사람들이 이미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영국과 미국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시각에 차이가 있었고 거기에 영국은 제주도를 전략적으로 일본영토로 하자고 주장하자-이 때 한국전쟁 시기라 영국은 한국전쟁에서 남한이 패배하여 공산주의화 될까 우려했다고 합니다- 이에 제주도는 대한민국 영토로 함과 동시에 싸움이 길어질 것 같은 독도를 아예 강화조약에서 빼 버린 것이지요.

     

    대일강화조약은 일본이 패전국으로서 맺어진 강화조약이지만 일본을 상당히 배려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딱 시기가 냉전시기였기 때문이지요. 연합국 총사령부 외교국장이었던 시볼드는 일본 영토를 경위도로 지정하거나 부속지도에서 일본 영토를 경계선으로 둘러싸는 것은 일본의 심리적 부담이 크다고 반대를 하였고-왜 패전국을 이렇게 배려하였을까요- 이에 1950년 1월 초안부터는 일본이 포기할 영역을 기술하고 지도는 첨부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은 공산주의세력이 태평양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일본을 꼭 잡고 있어야 했고 한국전쟁으로 공산주의가 이기느냐 자유주의가 이기느냐 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있었지요. 그래서 아마 마음들이 급했을 겁니다.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독도문제가 현재까지 왔습니다. 미국 쪽 초안 작성 실무자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몇 차례 건의했다고 하던데 미국이나 영국이나 암초 덩어리에 관심이나 있었을까요. 아니면 일본을 소련을 방어할 방어선으로 구축하는게 중요했을까요. 소련은 연합국이었음에도 대일강화조약에 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국제정세와 대한민국의 상황과 맞물리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안일하게 대처한 점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고 대한제국에서는 행정구역에 포함을 시킴으로써 행정권을 발휘하고 있었고 독도와 관련된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처리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봤을 때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라 할 수 있습니다.

  • #16680

    중도보수님의 의견 잘읽었습니다.

    저는 한나라의 영토를 주장하는 기록이라면 실질적내용+형식적요건 두가지를 만족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적요건은 정부문서 또는 그에 준하는 기관의 문서여야 합니다.

    실질적내용은 사실에 근거해야 하고 그 내용을 추정할수 있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되며 합리적의심을 제거할수 있을 정도의 명확성을 요한다는 겁니다.

    위의 내용은 굳이 국제사법재판소가 아니라 국내재판시에도 증거의 증거능력에 요구되는 일반적인 사항과 유사합니다.

    저는 19세기이전의 한국자료들은 어느것도 위의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1. 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에 관한 내용은 “두섬의 거리는 멀지 않고 날씨가 청명하면 볼수 있다”가 전부입니다.

    방위, 거리, 크기, 모양, 생태 어느것도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후 19세기까지 우산에 관한 다른 문헌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문장을 우산은 죽도가 아니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쓴다면 타당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도가 아니니 독도밖에 없다. 고로 우산은 독도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건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2. 서계잡록의 해당구절입니다.

     

    盖二島去此不甚遠 一颿風可至 于山島勢卑 不因海氣極淸朗 不登最高頂 則不可見

     

    대체로 두 섬은 거리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 한번 큰 바람을 타면 도달할 수 있다.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아주 맑지 않거나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울릉도는 자못 높아 풍랑이 잠잠하면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사슴,노루등이 때때로 바다를 넘어 나오고, 아침 해가 삼장정도가 되면 섬의 참새 무리가 죽변곶에 날아온다.

     

    서계잡록은 내륙에서 본 시점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래는 지식인에서 해당내용입니다.

     

    盖二島去此不甚遠

    중요한 논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문 측면에서만 아는 대로 대답합니다.

    去此는 영어로 하면 ‘from here’입니다. 此를 ‘이것’이라 해서 무엇인가 두 개를 이야기하다가 그 중 하나를 ‘이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따라서 ‘두 섬은 여기서 멀지 않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는 육지의 어느 곳을 말할 터인데, 제시된 문장에서는 寧海를 짚을 수밖에 없는데 혹시 화자(박세당)가 글 전체를 어딘가 다른 곳에서 쓴 것이라면 그곳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책 자체를 검토해야 확인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여기’가 육지를 말한다는 것은 그 다음 문장을 보면 또 알 수 있습니다. 곧 ‘우산도는 낮아서 잘 안 보이고, 울릉도는 조금 높아서 대개 잘 보인다’는 뜻의 말을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산도와 울릉도의 二島(두 섬)를 한꺼번에 보고 있는 시점(視點)입니다.

    따라서 울릉도에서 우산도를 본 관점일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시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던건 근처 뱃사람 몇몇뿐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산무릉에 관한 기록은 전해내려오는 말을 확인없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류일겁니다.

    장한상이 유일하게 독도를 인식한 관리이고 그 기록만이 독도를 어느정도 특정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에도 어렴풋이 보이는 섬을 언급하고 있고 저 섬이 우산이라고 칭하진 않습니다.

     

    3. 1900년 고종칙령41호의 석도가 독도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대신 몇가지 의심은 있습니다.

     

    왜 여지껏 쓰던 우산대신 석도가 등장하나요?

     

    칙령의 기본이된 우용정의 울릉도 탐사이후 작성된 지도에는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칙령직전의 청의서에서 독도는 그 관할구역밖입니다.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여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 것에 관한 청의서>

    ‘해당 섬 지방은 세로 80리(약32Km)이며 가로 약 50리(약20Km)’라고 되어 있습니다.

     

    1906년 황성신문의 기사는 울도군의 관할범위를 동서 60리 남북 40리 합이 200리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의 기록이 석도가 독도가 될수 없는 명백한 증거는 아니라 하더라도 합리적의심은 가능합니다.

     

    4. 심흥택보고서는 독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최초의 공식문서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심흥택은 황제가 명명한 석도 대신 왜 독도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황제가 칭한 호칭을 무시할만큼 배짱있는 사낸가요?

    6년만에 석도=독도라고 정부대신+황제까지 일반적으로 인식할수 있을정도로 언어의 변화가 극심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석도와 독도는 다른 섬이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대신들의 반응은 더 이상합니다.

     

    참정대신 지령문 3호

    올라온 보고는 다 읽었고, 독도 영지 운운하는 설은 전혀 그 근거가 없으니, 그 섬의 형편과 일본인의 동향을 다시 조사해 보고하라.

     

    내부대신 지령문

    도를 유람하러 온차에 토지의 경계와 호구를 적어가는 것은 이상한 점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독도가 일본속지가 되었다는 것은 필히 그 이유가 없으니, 이번 보고가 심히 아연할 따름이다.

     

    석도가 독도라면 일반적인 반응은 그 땅은 고종칙령41호로 우리땅이다라는 말이 나오는것이 일반적이지 않나요?

    그 어떤기록에도 고종칙령의 석도가 독도이니 시마네현 고시는 무효라고 항의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5. 대장성령과 총리부령은 확실히 중도보수님의 착각입니다.

    이 법령들은 영토권과 관련된 법령들이 아니라 재산,징세와 관련된 특별법들입니다.

    영토권과는 상관이 없는 법령들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보면 우리나라는 헌법과 판례에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자국영토로 보고 있지만 행정권의 발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여러 특별법으로 북한을 행정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정부의 공식입장은 북한은 우리영토라는 것입니다.

    남북교류법, 개성공단합의서등을 생각하시면 이해하실겁니다.

    또는 일본과의 어업협정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독도의 주권을 주장하지만 어업선은 울릉도와 오키섬을 기준으로 그었죠.

     

    6. 스카핀677은 일본의 행정, 정치한계선입니다.

    연합군은 전후 일본의 영토경계에 관한 권한이 없습니다.

    스카핀은 대일강화조약의 발효와 동시에 효력을 상실합니다.

    일본의 영토획정은 대일강화조약으로 획정됩니다.

     

    대일강화조약에 한국전쟁과 관련해 정치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어느정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연합국은 첨예한 의견대립이 있는 지역을 한쪽손을 들어주기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해당 지역은 나중에 두 나라가 외교적으로 해결할수도 있고 국제사법재판소라는 기관이 있었으니 자신들이 결정짓기 보다는 나중을 위해서 보류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승만라인을 긋고 점유를 하리라고는 예상못했을겁니다.

     

    • 이 답변은  주야에 의해 3 월, 3 주 전에 수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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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688

    한반도에는 섬이 3천개가 넘습니다. 독도는 그 섬들 중에 특별히 크지도 않고 사람이 살지도 않고 육지에서 왕래하기 쉽지도 않은 섬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독도를 두고 영토 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해양 국가도 아니었던 조선의 조정이 이 작은 섬에 관심을 가질 리는 만무했다고 봅니다.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동해 해중의 외딴 섬 무리를 두고 ‘섬이 2개라고도 하고 1개라고도 한다’라고 소개한 것은 그런 연유일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섬의 개수와 특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동해 해중에 있는 섬 무리가 조선의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와 별개로 조선 조정의 공식적인 입장은 동해 해중에 서로 구분되는 섬 2개가 있다는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동해 해중에 서로 청명한 날에 한해 볼 수 있을 정도 거리만큼 떨어진 두 섬이 있음을 말하고, 고려사에서 일도설이 먼저 나오기는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함께 수록된 팔도총도에서는 동해 해중에 우산도와 울릉도 2개 섬을 그리고 있어 당시 조선 조정에서 동해 해중에 2개의 구분되는 섬이 있음을 정설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부연해줍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안용복의 울릉도 쟁계를 기점으로 이전에는 막연하게 조선의 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동해 해중의 섬 무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18세기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는 1714년 강원도 어사 조석명이 영동지방 해역의 방어 대책 마련을 건의하며 ‘울릉도 동쪽에는 섬이 서로 잇달아 왜경(倭境)에 접해 있다’라고 말한 사실을 밝힙니다.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글 울릉도에서는 장한상의 일, 그리고 특히 안용복의 일을 자세히 소개하며 안용복을 영웅호걸로 칭하고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음에도 조정에서 귀양을 보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영조 대 지리학을 연구했던 것으로 유명한 실학자 신경준이 저술한 강계고에서는 ‘일설에 의하면 우산과 울릉은 한 섬이라고 하나 여러 도지를 보고 생각하면 두 섬인 것으로 하나는 소위 송도(마쓰시마)이고 두 섬은 모두 우산국인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18세기 영조의 명을 받아 홍봉한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에서는 여지지(현재 발굴되지 않음)를 인용하며 일본인이 말하는 송도(마쓰시마)가 우산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행정기관 비변사에서 소장하고 있던, 18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에는 울릉도 동쪽에 우산이라고 표시된 섬이 있으며 두 개의 봉우리가 묘사되어 있어 이 섬이 바로 독도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조선 영조 대 실학자 정상기가 제작 주도하여 만든 동국대지도에서는 울릉도 동쪽에 울릉도보다 조금 작은 섬 우산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영조 대 실학자 이중환이 제작한 택리지에는 장한상의 기록을 소개하며 독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 필사본에는 울릉도 동쪽에 우산이라고 표기된 섬이 있으며, 이 섬에 있는 산 표시를 통해 여기에 표시된 섬이 평평한 죽서도가 아니라 독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808년 순조의 명을 받아 서영보, 심상규 등이 제작한 ‘만기요람’에서도 동국문헌비고에서와 같이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이며 우산은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다’라고 밝힙니다.

    대한제국에서 동국문헌비고를 기반으로 1903년 편찬을 시작해 1908년에 완성한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우산도와 울릉도를 설명하며 ‘두 섬으로 하나가 바로 우산이다. 지금은 울도군으로 되었다(이 문장은 본래 글에서 증보하며 추가한 문장입니다).’라고 밝힙니다.

     

    주야님께서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요구하는 근거 자료가 방위, 거리, 섬의 생김새 등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의 설명을 거짓으로 보지 않는 한, 울릉군의 섬 무리들 중에 이 설명에 부합하는 섬은 독도가 유일합니다.

     

    서계잡록이라는 책은 서계 박세당의 잡다한 글을 모은 책으로 행정적으로 보나 지리학적으로 보나 별다른 권위는 없어 보이고, 울릉도 쟁계가 있기 전 울릉도에 대한 조선 문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서계잡록의 구절에서 ‘사슴, 노루 등이 때때로 바다를 넘어 나온다’는 부분은 예로부터 쥐를 제외한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가 없었던 울릉도의 생태와 맞지 않는데 아마 울릉도에 대한 신화적인 전승 등을 참조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울릉도 및 우산도 등에 대한 조선의 기록들 중 명확하지 않은 것, 일관되지 못한 것들이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식이 빠르게 전파되거나 교체되기 어려웠던 환경의 탓이 있습니다. 실측 결과로 개정된 문헌과 정보가 부족해 오류가 있었던 옛 문헌, 해석이나 기입 등의 실수로 오류가 있었던 문헌이 공존했기 때문에 후대에도 잘못된 문헌들을 참조하여 오류를 포함한 문헌 또는 지도가 재생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헌이 있었다고 해서 조선 후기 여러 문헌으로 이어져온 독도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독도 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라고 생각합니다. 칙령의 석도는 여러 정황 상 독도를 의미함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야님께서는 1900년 10월 의정부 청의서의 ‘해당 섬 지방은 세로 80리이며 가로 약 50리’라는 부분을 들어 독도가 그 관할구역 밖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한 섬 지방의 범위가 곧 관할구역이라는 근거는 의정부 청의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음은 의정부 청의서 해당 부분의 역문입니다.

     

    해도(울릉도)가 동해에 우뚝 서있어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개국 504년에 도감(島監)을 두어 도민을 보호하고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울릉도 도감 배계주의 보첩(報牒) 및 본부 시찰관 우용정과 동래 세무사의 시찰록(視察錄)을 서로 대조하여 조사해 보니, 땅은 사방이 가로가 80리, 세로는 50리이다(오기인 것 같습니다; 실제 한자를 비교해보니 세로가 80리, 가로는 50리가 맞는 듯합니다.), 사방이 험한 절벽이고 가운데 큰 산이 있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르고 있다. 그 사이에 큰 내가 있어 몇 척의 배가 드나들 만큼 깊다.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이 질박하여 수십 년 전부터 백성들과 가축이 번식하여 호수가 400가구가 넘고, 개간한 밭이 만여 두락이다. 거주민의 일년 농작은 그 수효가 감자(藷)는 2만 여포가 되고, 보리가 2만 여포, 황두(黃豆)가 1만 여포, 밀이 5천 포라”고 합니다.

     

    대체로 호수(戶數)와 전토의 수와 곡물의 수효를 육지의 산군(山郡)과 비교해보면, 수효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크게 차이 나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외국인이 와서 교역하는데 교제상으로도 그런 점이 있는지라, 도감이라 호칭하는 것이 행정상 과연 방애됨이 있습니다. 이에 울릉도를 울도라고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 것이 타당하겠기에 이 칙령안을 회의에 올립니다.

     

    -출처: 외교부 독도-

     

    앞뒤 문맥을 볼 때, 문제의 문장 뒤로 이어지는 설명이 모두 울릉도 본섬에 대한 것이므로 문제의 문장 역시 울릉도 본섬의 크기에 대한 설명이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문제의 문장이 관할 범위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청의서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1906년의 황성신문 기사에서 울도군의 관할범위를 말하며 ‘동서 60리 남북 40리 합이 200리’로 한정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표현은 대동여지도(1861년)와 대동방여도(1858년)의 울릉도 지도에도 있고 1895년의 조선지지에는 특히 ‘울릉도는 울진에 있으니 둘레가 200여리, 동서가 60여리요, 남북이 40여리라’로 나와있습니다. 즉 말씀해주신 표현은 예로부터 울릉도의 크기를 이르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또한 황성신문은 민간자본 신문이기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를 대변하지 않음에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전까지 우산도로 칭하던 섬을 석도로 개칭한 이유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본 것들 중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로부터 ‘우산도’라는 명칭을 사용해오며 여러 고문헌, 고지도의 오류 때문에 근대에도 왕왕 이 명칭에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예시로 우산도가 울릉도와 함께 동해 해중에 있다는 기록을 잘못 해석하여 울릉도 옆의 죽도를 우산도로 표기한 등의 자료가 18세기 이후에도 나타나곤 합니다. 또한 고종실록의 1882년 고종과 이규원 사이 대화에서도 우산도 명칭에 대한 혼란이 나타납니다. 대한제국에서는 우산도를 새로운 명칭으로 개칭함으로 그간 있어왔던 혼란을 봉쇄하고자 했을 것이라는 설입니다.(혹은 우용정의 시찰 당시에 울도 군수가 (울릉도 주민이 독도를 독섬으로 칭했으므로) 독도를 두고 ‘석도’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그 명칭을 ‘석도’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역시 여러 설 중 제가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울릉도의 주민 대부분이 전라도 출신의 어민이었는데 이들이 독도를 돌섬으로 불렀고 여기에서 본을 따와 섬의 명칭을 ‘석도’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전남 고흥에 독도, 석도, 독섬이라는 이름의 세 개 섬이 실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또한 이와 별개로 울릉도에 매우 가까이 붙어 있는 지금의 ‘관음도’라는 작은 섬은 ‘섬목’으로 불렸으며, 이규원의 보고서에서 이를 한자로 풀이한 ‘도항’으로, 우용정의 1899년 보고서에서 함께 갔던 일본인이 그린 지도에는 (아마 목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랬던 것으로 보이는) ‘도목’이라는 명칭으로, 1908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조사하면서는 (‘섬목’에서 목을 어떻게 풀이할지는 알았지만 섬을 잘 못 알아들은 것으로 보이는) ‘서항도’라는 명칭으로 나타납니다. 석도가 관음도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습니다.

     

    말씀하신 것과 달리 심흥택 보고서는 독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최초의 공식문서가 아닙니다. 이미 1904년 9월 25일 일본 군함 니타카호가 독도를 탐문하며 행동일지에 ‘한인은 리앙코르도암을 독도라고 쓴다’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 이는 울릉도 주민들이 이 섬을 독도라고 불렀음을 보여줍니다.(돌섬, 독섬, 독도, 석도 등의 표현이 공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독도라는 명칭은 한편으로 울릉도 주민들이 사용했던 표현이자, 당대 일본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리앙코르도암의 한국명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심흥택 보고서에는 ‘본 군 소속 독도가’라는 표현이 있어 울도 군수 심흥택이 독도를 울도군 소속으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땅은 고종칙령41호로 우리 땅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은 주야님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울도 군수가 독도가 어떤 경위로 우리 땅이 되었는지 모르는 게 아닌 한에는 굳이 언급할 필요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심흥택은 독도가 울도 군 소속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참정대신과 내부대신은 그 지령문에서 독도가 일본땅이 되었다는 말은 근거 없는 일이므로 동향을 다시 조사해 보고하라고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충분히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대한매일신문, 황성신문에 보도되었고, 대한제국의 학자 황현의 일기 매천야록에도 기록되어 일반인들 역시 이 일을 알고 분노했음을 알려줍니다.

     

    1902년 10월 16일 일본 외무성이 편찬한 ‘통상휘찬 제234호’의 글, ‘한국울릉도사정’에서는 ‘울릉도 정동쪽 약 50해리(92km)에 작은 섬 3개가 있다. 속칭 리양코도라고 하는데 일본인은 마쓰시마라고 한다. 이곳에서 전복을 캐고자 울릉도에서 출어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 섬에 식수가 없으므로 오래 출어할 수 없어 4~5일 후 울릉도에 귀항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1902년 당시 울릉도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독도를 알고 이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규원과 우용정의 울릉도 탐사 목적은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의 불법 행위 현황을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부속도서를 기록하고자 주변 해역을 돌아볼 여유 및 이유는 없었고 다만 이규원은 맑은 날에 높은 곳에 올라 주변 해역을 둘러보았지만 섬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이와 함께 울릉도 주민들은 송도, 죽도, 우산도를 근방의 섬으로 여기고 있다는 보고도 합니다).

     

    이규원의 1882년 보고 이후 일본인의 불법 행위가 심하다 하여 울릉도에 섬의 업무를 맡을 도장을 두기로 했으나 초대 도장이었던 전석규는 오히려 일본인에게 증표를 주며 돈과 쌀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1884년 해임되었습니다. 이후 울릉도는 평해군수와 월송만호가 번갈아가며 관리하다가 1895년 내무대신 박영효의 건의로 울릉도에서 울릉도감을 별도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울릉도 토박이였던 배계주가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도감을 감무로, 감무를 군수로 개정할 때까지 배계주가 울릉도 관리를 계속하여 초대 군수가 되었습니다. 우용정의 시찰 역시 배계주의 보고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울도 군수 배계주는 울릉도 토박이로 울릉도에서 일본인과 사이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분쟁에 관여했던 만큼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이전에 조선에서 독도를 알지 못했다는 주장은 이러한 전후 관계를 무시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독도는 우리의 땅입니다. 기록에 다소 오류가 있었던 때도 있고 불확실한 것도 있지만 조선 전기에는 동해 해중에 있는 울릉도와 구분되는 섬으로, 조선 후기에는 안용복의 울릉도 쟁계에서 대두되었던 우리나라의 섬으로, 대한제국에서는 울도 군에 소속된 섬으로 인식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야님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독도에 대해 처음으로 자세히 공부해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용한 자료들의 타당성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싶어 답변이 이리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은 이렇게 답변을 올려봅니다.

  • #16700

    들라코거스님 글 잘읽었습니다.

    먼저 위에 제가 처음적은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우리나라에서 주장하는 증거의 증명력과 증거능력에 관한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본측 주장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될수 있는 한 논거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장한상수토 이전 조선조정은 우산, 무릉의 형태, 갯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봅니다.

    이건 당시 문헌이나 지도를 보면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심지어 당시 조정은 장한상의 울릉도수토기록이 자신들의 지식과 맞지 않자 장한상의 수토사실 자체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숙종실록>

    “然, 時漢相所圖上山川道里, 與《輿地勝覽》所載多舛, 故或疑漢相所至, 非眞鬱陵島也。”

    이때 장한상(張漢相)이 그려서 올린 산천(山川)과 도리(道里)가 《여지승람》의 기록과 틀리는 것이 많으므로, 혹자는 장한상이 가 본 데가 진짜 울릉도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1. 세종실록지리지

    이전글에서도 적었지만 우산이 독도라고 주장하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단순히 소거법으로 추정하는것은 의미없습니다.

    실록의 문장으로 우산이 독도라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다음 두가지 논점에대해 합리적인 반론이 있어야 합니다.

    • 실록은 두섬이 멀지 않다고 합니다.

    울릉도와 독도는 90km떨어져 있습니다.

    • 실록을 계승한 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를 비롯한 당시의 지도는 우산을 지금의 울릉도 서쪽에 그리고 있습니다.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산을 독도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날씨가 청명하면 볼수 있다는 문장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공도정책으로 울릉도에 갈수 없었고 과거기록으로 두 섬이 있다는건 알고 있었을겁니다.

    울진현에서 울릉도를 봤을때 순차적으로 보이는 산봉우리가 마치 두 섬처럼 보입니다.

    앞의 작은 산봉우리를 우산, 뒤의 큰 산봉우리를 무릉으로 표시한건 아닐까요.

    그래서 지도에 우산이 울릉도의 서쪽에 표기된것이겠죠.

    그렇다면 날씨가 청명하면 두 섬을 볼수 있다는 것은 내륙에서 울릉도를 볼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고지도의 우산도표기문제는 장한상수토이후 조금씩 사라지고 우산의 위치는 현재 죽도위치인 울릉도 동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장한상은 울릉도수토 당시 지금의 죽도와 독도를 모두 목격했습니다.

    우산이 독도라면 고지도의 우산이 지금의 죽도위치로 옮겨갈리가 없죠.

     

    2. 우산도=송도=독도

    강계고(1756), 동국문헌비고(1770), 만기요람(1808)등의 기록에서 우산도=송도설은 모두 여지지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지에는 동기록이 없고 현재 남아있지 않는 유형원의 여지지를 말하는것이 아닌가 추측되어 집니다.]

    원문을 찾아볼수 없어서 어떤 과정으로 저런 기록이 남았는지 확인할수 없었습니다.

    다만 안용복의 진술기록에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숙종실록>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제가 앞장 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송도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하였습니다.

     

    여기는 부분만 인용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안용복의 진술은 논리에 맞지않는 점이 여러군데 보이고 전체적으로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혐의를 줄이기 위해 이런 진술을 한것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안용복진술의 우산도와 관련부분만 보면 두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 송도에 왜인이 살고 있다.

    독도는 사람이 살수없는 곳입니다.

    반면 지금의 죽도는 과거부터 사람이 살았던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측 기록에도 독도는 울릉도 도해시 기착지로 사용된 기록만 존재합니다.

    • 우산도는 울릉도 동북쪽에 있다.

    울릉도 동북쪽에 있는것은 죽도입니다.

    이런 기록에 근거해 저는 우산도=송도설에서의 송도는 지금의 죽도라고 생각합니다.

    이규원의 검찰기록에서도 죽도를 송죽도라고 칭합니다.

    삼국접양지도(1802)등 몇몇 일본지도를 보면 현재 죽도의 위치의 섬에 송도라는 표식이 있습니다.

     

    3. 고지도

    말씀하신 비변사의 지도가 <조선지도 (朝鮮地圖)(古4709-38) 강원도편> 맞나요?

    이 지도의 우산도가 독도를 가르킨다고는 생각할수 없네요.

     

    대동여지도 필사본은 우산의 위치와 모양이 현재의 죽도와 거의 일치합니다.

    우산의 표식에 관해서는 김정호는 산이 없는 다른 섬에도 동표식을 하고 있습니다.

     

    4.황성신문

    황성신문의 기사는 일반기사가 아니라 통감부의 울릉도 소관청의 설치일자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질의의 내부의 답문을 옮겨 실은 내용입니다.

    전문으로서 공식문서의 성격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예로 든것입니다.

     

    5. 심흥택 보고서

    심흥택 보고서를 최초의 공식문서라고 한것은 우리나라의 자료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측 자료를 빌리자면 독도 표현은 1902년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당시 강치잡이노동자로 울릉도 주민들을 고용했는데 그 사람들이 량꼬도를 독도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량꼬도는 Liancourt Rocks를 말합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심흥택 보고서의 “본도 독도”는 어느정도 독도영유권주장의 근거로 타당성이 있는거 같습니다.

    조정의 인식이 아니라 공무원개인의 인식이고 이후 아무런 관리기록이 없다는 한계는 있으나 명확하게 독도를 자국영토로 인식했다는 장점도 있네요.

    대신들의 항의는 소극적이지만 긍정적으로 볼수 있는면도 있는것 같습니다.

     

    5. 석도=>돌섬=>독섬=>독도

    언어의 변화는 오랜시간에 걸쳐 천천히 일어나는것이 상식입니다.

    또한 이런 언어의 변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두가지이상의 단어의 혼용기간이 생깁니다.

    하지만 황제가 임명한 석도가 독도로 변하는 과정은 2년도 걸리지 않습니다.(1902년 독도기록이 있습니다.)

    왕이 과거 1500년이상 우산도라 불리던곳을 뜬금없이 석도라 칭하고 이후 2년만에 돌섬 > 독섬 > 독도로 변하고 그 중간과정의 기록(돌섬or독섬)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시대에도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단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저런일이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더구나 석도는 경술국치이후에도 여전히 공문서에 등장합니다.

    울릉도 북면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관음도가 석도가 아니라는 것은 저또한 동의합니다.

    저는 석도가 울릉도 근처의 돌섬군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고지도엔 돌섬군락을 석도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는게 근거입니다.

     

    6. 통상휘찬 제234호

    ‘통상휘찬 제234호’의 글과 관련해서 19세기이후 조선에서 독도를 인식하는 기록이 늘고있는것은 잘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국가의인식+지속적관리가 필요합니다.

    이런식의 주민들의 이용기록은 일본의 경우 17세기부터 존재합니다.

     

    7. 이규원기록

    이규원기록에서 주민들이 송도, 죽도, 우산도를 근방의 섬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하시는데, 이규원의 기록을 보면 울릉도를 우산도라고 하였고 지금의 죽도를 송죽도라고 하였습니다.

    송도와 죽도는 부정하였고 이외의 다른 섬을 보지 못하였다고 보고했습니다.

     

    <검찰일기>

    松竹于山等島 僑寓諸人 皆以傍近小島 當之 然旣無圖籍之可據 又無鄕導之指的 晴明之日 登高遠眺 則千里可窮 而更無一拳石一撮土 則于山之稱鬱陵 即 如耽羅之稱濟州是白如乎

    송죽도, 우산도 등 섬은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근방의 작은 섬들이 그것들이라 했으나 참작할 만한 지도도 없고 안내할 현지인도 없어서 맑은 날 높은 곳에 올라가 보니 천리 안에 주먹만한 돌도 한 줌의 흙도 없었습니다. 울릉도를 우산이라 칭하는 것은 제주도를 탐라라 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아뢰면 어떨까 합니다.

     

    <고종실록>

    “울릉도(鬱陵島)에는 근래에 와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무때나 왕래하면서 제멋대로 편리를 도모하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송죽도(松竹島)와 우산도(芋山島)는 울릉도의 곁에 있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또 무슨 물건이 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번에 그대가 가게 된 것은 특별히 가려 차임(差任)한 것이니 각별히 검찰하라. 그리고 앞으로 읍(邑)을 세울 생각이니, 반드시 지도와 함께 별단(別單)에 자세히 적어 보고하라.”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우산도는 바로 울릉도이며 우산(芋山)이란 바로 옛날의 우산국의 국도(國都) 이름입니다. 송죽도는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 떨어진 거리는 30리(里)쯤 됩니다. 여기서 나는 물건은 단향(檀香)과 간죽(簡竹)이라고 합니다.”

     

     

    ※들라코거스님의 글중에 제가 모르고 있는 기록도 몇개 있어서 저도 다시 공부하게 되었네요.

     

    • 이 답변은  주야에 의해 3 월, 2 주 전에 수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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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715

    예, 감사합니다. 제가 학생이라 자료를 찾고 글을 쓰는 데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습니다. 답변이 늦어지는 점, 글이 좀 횡설수설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장한상 수토 이전 조선 조정에서 우산, 무릉의 형태, 개수 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거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산도에 대한 정보가 문제의 문장 하나뿐이므로 우산이 독도라는 주장에 대한 명백한 증거 자료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조선 전기 이전 시대부터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정황을 더해주는 정도의 의미는 있다고 봅니다.

     

    말씀해주신 논점 중 첫 번째는 한문의 해석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다.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로 해석한다면 말씀해주신 부분이 성립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많은 해석이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로 되어 있어 ‘거리가 멀지 않다’는 절은 단순히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의 부연설명 정도일 뿐 그 자체 의미를 갖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팔도총도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지도가 우산을 울릉도의 서쪽 등 잘못된 위치에 그린 것은 그만큼 조선 전기에 두 섬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전 시대의 문헌들로부터 동해 해중에 2개의 구분되는 섬이 있다는 정도만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고지도상의 우산도 묘사로부터 우산도에 대한 인식 변화를 연구한 논문이 있습니다. ‘고지도상의 「우산도」 명칭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인데, 조선시대 울릉도 지도의 계통을 어느 유형 빼먹지 않고 제법 잘 정리한 것 같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조선시대 지도에서 우산도에 대한 인식이 일관되지 않음을 말하지만, 또한 조선 말기에는 우산도를 죽도와 별개의 섬으로 표기하는 지도들이 나온다는 점도 짚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해석에 대해 말씀해주신 바는 비록 추측이긴 하나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울진군에서 울릉도를 찍은, 두 섬처럼 보이는 사진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못 찾았는데 사진이 있다면 링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고려 문신 이승휴가 삼척에서 무릉도가 보인다고 한 기록과 2010년도에 삼척군에서 촬영한 울릉도 사진을 찾았으나 사진 상에서는 한 섬으로 보였습니다)

     

    ‘우산이 독도라면 장한상의 수토 이후 고지도의 우산이 지금의 죽도위치로 옮겨갈 리가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장한상이 울릉도를 처음으로 수토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다른 수토관들 역시 같은 지위에서 울릉도를 수토했기 때문입니다. 장한상이 울릉도 높은 봉우리에 올라 희미한 독도를 관찰한 사실을 기록했지만 다른 수토관들은 같은 시도를 했을 때도 독도를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독도연구소’에서 2008년 7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울릉도에서 독도를 관측하는 ‘독도 가시일수 조사’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조사 결과를 요약한 글에서는 “기상학적 관점에서 상시 모니터링 결과, 독도는 1년 매월 상시 관측되는데, 계절적으로 가을(특히 9월, 11월)에 잘 보이며, 독도가 보이기 전후에는 대개 비나 눈이 내린 것이 특징적이라는 것을 밝혔다.”라고 합니다.

     

    울릉군청의 독도관리사무소에서는 “연중 85%가 흐리거나 눈비가 내린다.”, “울릉도 인근은 안개가 많고 연중 흐린 날이 160일 이상이며, 강우일수는 150일 정도이다.”라고 합니다.

     

    장한상은 안용복의 울릉도 쟁계로 9월 즈음에 울릉도에 파견되어 시기적으로 독도를 관찰할 수 있었지만, 울릉도 수토제가 확립된 이후로는 대부분 음력 4월 말에서 5월 정도에 울릉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독도를 관찰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후 수토관들은 (각종 기록을 통해) 동해 해중에 있는 우산도가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은 알아 지도에 기록할 필요는 느꼈지만, 실제 독도를 관찰하지는 못해 가까운 큰 섬인 죽도에 ‘소위 우산도’라고 표시하거나, 또는 기록에 근거하여 울릉도 동쪽에 임의의 큰 섬을 그려 우산도로 표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안용복의 울릉도 쟁계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해주셨습니다. 물론 저는 울릉도 쟁계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 안용복의 진술만을 토대로 해서는 안 되며 일본의 사료를 함께 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인이 송도에 산다’고 한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주셨습니다. 지금의 죽도는 과거부터 사람이 산 기록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느 문헌을 참조하셨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죽도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을 발견하지는 못했고, 대신 사람이 살기 무척 어려운 환경이라는 자료를 찾았습니다. 죽도는 사방이 수직에 가까운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이라 접근이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또한 죽도에는 식수원이 없어 지금도 빗물과 함께 울릉도에서 식수를 가져다 쓴다고 합니다. 죽도의 선착장 또한 근현대의 대한민국 정부 들어서 처음 만든 것이라는 글도 있었는데 이 부분은 다른 자료는 찾지 못해 정확한 정보라고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일본인들이 체류를 했다고 할 때에, 가까운 울릉도를 두고 굳이 죽도에서 생활하고자 했을지 의문이고 차라리 서도에 샘물이 있어 식수로 활용할 수 있는 독도가 잠시 동안이라도 생활하기에는 더 나은 환경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울릉도 쟁계 교섭 당시 쓰시마 번사였던 ‘고시 쓰네우에몬’이 편집한 ‘다케시마 기사’에서 우산도에 대한 안용복의 진술을 보면, ‘우산도는 울릉도 동북쪽에 있다, 울릉도에서 하루 정도 거리에 있다, 자신은 우산도를 두 번 보았다’라고 진술했습니다. 주야님께서는 울릉도 쟁계에서 언급된 마쓰시마가 지금의 죽도라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가설은 안용복의 진술 중 ‘하루 정도 거리에 있다’와 ‘우산도를 두 번 보았다’라는 말을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의 죽도는 울릉도에서 약 2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이는 지금 울릉도에서 배를 타면 20분만에도 가는 거리입니다. 또한 죽도는 기상상황이 나쁘거나 안개가 끼어도 울릉도에서 보이는 섬인데 두 번만 보았을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안용복이 말한 우산도는 독도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울릉도에서 생활하며 독도를 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날씨가 청명한 날에 울릉도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 희미하게 보이는 독도를 확인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울릉도에서 독도 쪽으로 10km 이상 떨어진 해상에서 독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안용복 등 어부들이 날씨가 청명한 날 바다가 아닌 산에 올라 독도를 확인할 가능성은 적으므로, 안용복이 2번 보았다고 진술한 우산도가 독도라고 할 때 안용복은 해상에서 독도를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목격 지점이 두 섬을 잇는 직선상이라면 그때는 나침반을 사용해 울릉도에서 우산도의 방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라카미 가문 문서’에 의하면 안용복의 배에는 나침반이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안용복의 진술에서 ‘우산도가 동북쪽에 있다’고 하는 말에만 지나치게 의존해 우산도를 규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독도의 방향을 구면삼각법으로 계산하면 동쪽에서 18도 남측이고, 동북 방향과는 63도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문제의 우산도를 독도라고 할 때, 해상에서 나침반도 없었던 안용복으로서는 충분히 독도의 방향을 동북으로 헷갈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한편 ‘다케시마 기사’에는 부산 왜관에 머물던 일본인 역관이 알고 지내는 조선인으로부터 ‘울릉도 동북쪽에 희미하게 보인다’는 부룬세미라는 섬에 대한 말을 듣고 쓰시마번에 서한을 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부룬세미’가 한국어로는 무엇일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울릉도 멀리 동북쪽에 섬이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면 안용복을 비롯한 어민들의 관찰이 이러한 선행지식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울릉도 쟁계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며 국무총리실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의 2007년도 연구 [안용복 사건에 대한 검증]을 주로 참조했습니다.

     

    지도를 말하며 명확히 말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한 지도는 <조선지도 (朝鮮地圖)(古4709-38) 강원도편>이 아니라, 2008년 12월 22일 보물 제1587호로 지정된 ‘조선지도’의 울릉도 부분입니다.

     

    대동여지도의 경우에는 말씀해주신 것처럼 김정호가 산이 없는 섬에도 산맥 표시를 하는 오류를 자주 범했다면 우산도에 대해서도 표시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겠습니다.(혹시 가능하다면 예시적으로 어떤 섬에 산이 없음에도 산 표시가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오류가 얼마나 있는지 자료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잘 찾지 못했습니다) 또한 자료를 찾다보니 숭실대학교가 소장한 청구도의 울릉도 동남쪽에 동도와 서도가 실제와 얼추 비슷한 크기와 방향, 위치에 그려져 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김정호가 독도에 대해 꽤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인데 이 방면의 연구가 없어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조선 후기까지 조정에서 독도에 대한 인식이 일관되고 명확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울도군의 배치전말

    통감부에서 내부에 공함하되 강원도삼척군관하에 소재울릉도에 소속도서와 군청설시 연월을 시명하라는 고로 답함하되 광무이년오월이십일에 울릉도감으로 설시하였다가 광무사년십월이십오일에 정부회의를 경유하야 군수를 배치하니 군청은 태하동에 재하고 해군소관도는 죽도석도오 동서가 육십리오 남북이 사십리니 합이백여리라고 하얏다더라

     

    우선 이 기사가 통감부의 울릉도 소관청의 설치일자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질의의 내부의 답문을 옮겨 실은 내용이라는 말씀을 뒷받침할 다른 자료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통감부와 내부의 문답에 대해 황성신문 외 자료가 따로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했고, 따라서 이 기사에 ‘고로 담합하되 ~ 라고 하얏다더라’라고 하여 인용하는 듯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신문 기사 작성자가 지면에 들어맞도록 내용을 요약한 것인지, 재구성한 것인지, 아니면 통감부와 내부는 대면하여 상세한 문답을 했는데 신문에는 단지 이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여 보도하도록 한 것인지 알 길이 없으므로 내용을 해석함에 있어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조선지지를 참고할 때 당시의 ‘동서 60리 남북 40리 합 200여리’ 표현은 섬 울릉도의 동서 길이, 남북 길이, 둘레 길이를 뜻한다고, 또는 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한편 기사에서는 울릉도감 설시일은 광무 2년, 즉 1898년의 일이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울릉도감이 설치되어 초대 울릉도감이 임명된 것은 1895년이었습니다. 이는 신문 기사를 쓴 사람 또는 내부의 답변자가 실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참고할 때, 황성신문의 기사만으로 당시 통감부와 내부의 문답을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독도 표현이 1902년에 최초로 등장하는지는 몰랐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몇 년 사이에 한 섬에 ‘석도, 독도, 돌섬 및 독섬’이라는 많은 명칭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해주셨습니다. 이는 단 몇 년 사이에 명칭이 변화한 게 아니라 동시대에 공존하던 명칭들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울릉도 주민들에게는 순우리말로 ‘독섬’으로 불렸고, 이를 정부에서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하며 그 의미를 한자어로 번역하여 ‘석도’라고 지칭했을 것입니다. 한편 조선의 방언까지는 몰랐을 일본의 조사에서는 ‘독’자를 해석하지 못해 ‘독도’로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같은 시기에 같은 섬을 두고 울릉도 한인 주민은 독섬으로, 울릉도 일본인 거주자와 울릉도 근해를 오갔던 일본인 조사단은 량코도, 다케시마, 또는 ‘독도’로, 그리고 조정의 공식 칙령에서는 ‘석도’로 칭했을 공산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에서야 그 명칭들을 무척 다르게 여길 수 있지만, 조선 말기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 표기의 차이는 상황 맥락을 통해서 충분히 같은 섬으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순우리말 이름을 가진 섬을 공식적으로 칭할 때 한자어로 번역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석도’를 ‘독도’로 봄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고지도에는 돌섬 군락을 석도로 표기하기도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관련된 예시를 찾아보니 동역도의 평안도 지도가 있더군요(이런 식의 표기를 공식적인 칙령에서 사용할 정도라면 예시가 더 있을 것도 같은데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주야님께서 알고 계시는 다른 예시가 있다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때의 ‘석도’는 서로 가까이 있어 다른 군락과 구별이 되는 돌섬 6개를 한데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한편 이규원의 울릉도외도를 참고하면 돌섬이 한데 모여 있다기보다도 해안선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돌섬이 서로 반대편에 있기도 해 하나의 군락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칙령에서는 울도군의 구역을 말할 때 ‘울릉도’가 아닌 ‘울릉전도’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울릉도 해안의 자잘한 바위섬을 포괄하는 의미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일기에서 섬에 대한 것은 제가 잘못된 정보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고종실록에서 이규원의 발언은, 주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것으로 사료되지만, 이규원이 울릉도를 탐사하기 전에 한 말로, 조선 무신 이규원 개인의 생각입니다. 물론 이규원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당시 조정의 대신들이 울릉도 지방에 대해 알아볼 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우산도에 대한 정보가 혼란스러웠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이 독도에 대해 자료를 찾다보니, 주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애초에 1905년 이전에 독도가 조선의 땅이었다는, 꼬투리 잡힐 일 없이 명백한 증거가 있었더라면 일본에서 이렇게 분쟁을 일으킬 명분도 없었겠죠. 또한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주장했던 증거들 중에도 더러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었다는 결론을 전제하고 문헌과 지도를 입맛대로 해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도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안용복의 울릉도 쟁계와 장한상의 수토 이후로는 조선 후기까지도 독도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았고, 조선 말기에 들어서나 다시 조금씩 독도에 대한 인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대한제국의 석도는 독도를 이르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누가 봐도 석도를 독도라고 인정할 수 있는 명백한 자료’는 발굴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주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능성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주야님께서 주장하시는 바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논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제가 느낀 바를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

  • #16719

    들라코거스님 글 잘읽었습니다.

    들라코거스님의 글을 읽으며 저도 제가 접했던 자료들의 정확성을 확인하려 1차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두가지 부분은 제 착각입니다.

    • 죽도에 사람이 살았던 기록

    이건 태종실록을 보며 제 입맞에 맞게 해석했네요.

    • 1902년 독도최초 표기

    확인해보니 제가 본 자료는 1907년 자료였습니다.

    최초의 기록은 1904년이 맞는것 같습니다.

    확인하지 않은 자료로 혼란을 드린점 죄송합니다.

     

    1.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의 해석과 관련하여 내륙에서 볼때 두섬으로 보일수도 있다고 한 것은 지금 우리 인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겁니다.

    울릉도의 모양을 알고 있는 우리는 어떤식으로 보이던 한 섬으로 인식하겠죠.

    하지만 과거 조선시대 사람들은 두 섬이라고 듣고 인식한 상태에서 봤을때는 앞뒤로 보이는 산맥을 우산과 무릉이라고 인식할수도 있었을겁니다.

    중요한 것은 세종실록의 문장을 내륙에서 본 관점으로 해석했을때 더 자연스럽다는 거죠.

    당시 지도의 모순도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사진첨부가 안되네요. 모바일이라 그런가ㅠㅠ

     

    2. 안용복

    안용복사건과 관련해서는 안용복의 진술은 앞뒤가 맞지않는 부분이 많아서 합리적으로 분석하기 어렵습니다.

    그 내용에 모순적인 부분이 많아 한 나라의 영토를 주장하는 근거로 쓸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들라코거스님이 문제로 삼으신 “하루정도의 거리”부분은 우산도=죽도의 경우 저도 여러 자료를 찾아봤으나 설득력이 부족한건 사실입니다.

    만족스럽진 않아도 모게시판에 이 부분과 관련한 논의가 있어 인용하겠습니다.

     

    “배를 타고 영해(寧海) 사는 뱃사공 유일부(劉日夫) 등과 함께 떠나 그 섬에 이르렀는데, 주산(主山)인 삼봉(三峯)은 삼각산(三角山)보다 높았고, 남에서 북까지는 이틀길이고 동에서 서까지도 그러하였습니다. 산에는 잡목(雜木)·매[鷹]·까마귀·고양이가 많았고, 왜선(倭船)도 많이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위는 안용복의 진술내용입니다.

    그런데 중간쯤 보시면 안용복의 거리인식을 가늠할 수 있는 진술이 있습니다.

    안용복은 울릉도의 남에서북까지를 이틀길이라고 얘기합니다. (울릉도 남북은 9.5km정도입니다. 동서는 10km.)

    안용복이 1차도일때 납치된 곳은 저동 근처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동에서 죽도까지는 7km정도입니다.

    9.5km를 이틀거리로 인식했다면 단순히 거리만 보면 7km는 하루거리라 할수도 있는 거리입니다.

    물론 산을 가로지르는 길과 뱃길은 다릅니다.

     

    “두번 보았다”는 부분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저동에서 죽도는 멀지 않게 보입니다.

    안용복은 약3-45일정도 울릉도에서 머문걸로 보입니다.(일본 어부들에게 한 말을 기준하면 45일, 오키국에서의 진술을 기준하면 20일, 박어둔의 진술을 기준하면 3일)

    박어둔의 진술대로라면 두번 보았다는것도 이해가되지만 이것은 자신의 혐의를 줄이기 위한 거짓말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산도는 독도인가요?

    아닙니다. 안용복은 우산도를 동북방향이라 합니다.

    저는 들라코거스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안용복이 방향을 착각했을 확률은 극히 적다고 생각합니다.

    안용복이 만약 독도를 봤다면 바다로 나가서 봤을거라는 얘기는 동의합니다. (안용복이 울릉도에 갔을시기는 3-4월 사이고 성인봉에서 독도를 보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울릉도 근처해역은 물살이 험하고 해무도 짙은 지역입니다.

    그런 바다에 나가는데 나침반도 없이 나간다는 건 생각하기 힘듭니다.

    납치당시에는 어떤 이유로 나침반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평상시 항해중에는 나침반은 필수입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나침반 없이 독도가 보일정도의 위치까지 항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아무리 잘 알고있는 바다라도 나침반이 없다면 조금도 움직일수 없습니다.

    바다는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폭풍은 말할것도 없고 해무만 껴도 시계가 100미터도 확보되지 않습니다.

    만약 나침반이 없이 나갔다면 안용복은 바다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할 방법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우산도의 위치를 착각할리는 없겠죠.

     

    결국 우산도를 죽도로 보기에는 거리가 맞지않고 그렇다고 독도로 보기에는 방위가 맞지않습니다.

     

    안용복관련 자료를 조사하다보니 우산을 추정할만한 기록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1696년 안용복 2차도일시의 조사기록인 <원록각서>에 의하면, ‘子山’의 발음은 ‘소우산’(ソウサン)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699년의 수토관 전회일의 울릉도도형(추정)과 1702년의 수토관 이준명의 울릉도도형(추정)

    위 두지도를 보면 지금의 관음도와 죽도로 추정되는 곳을 소우산/ 대우산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3. 2008.12.22  보물1587조선지도
    독도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는것 같네요.

    저도 어지간한 고지도는 다봤는데 그중에 독도와 가장 비슷한 위치에 표시돼 있었던 건 18C말 <해동도 조선전도>였습니다.

     

     4. 청구도 산표식

    동지도의 대부분의 섬에 산표식이 그려져 있습니다.

    제주도의 우도를 보면 산이 없슴에도 산표시가 있습니다.

    청구도를 계승한 동여도를 봐도 동일한 표식이 있습니다.

     

     5. 숭실대학 청구도

    전국도의 독도부분에 마치 동도와 서도인듯한 점두개가 위치하지만 이 두점이 우산도라면 지명표기가 있었을 것 입니다.

    게다가 과연 섬을 생각하고 표기한 것 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근거는 이후의 지도에서 해당위치의 섬을 표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동청구도의 지역도를 보면 우산도는 동쪽에 죽도모양의 한섬으로 표현되있습니다.

     

    6. 1906 황성신문 기사

    이런 기사가 나게된 배경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통감부와 내부의 해당문서 또한 존재하지 않고 2008.2.22 <산인츄오심포>에 처음 기사화되었고 한 일본블로거의 자료를 기사화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7. 돌섬군락

    돌섬군락을 석도로 표기한 지도는 동역도 평안도가 맞습니다.

    제가 1차자료를 표기했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돌섬군락을 석도로 표기한 다른 사료는 없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8. 석도=독도

    사실 국제법적으로 보면 고지도나 고문헌에서 독도의 명칭, 위치등에 일관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ICJ에서 고지도는 큰힘이 없고 본원적 권리 또한 실효적지배로 부정된 판례가 있습니다.(말레이시아판결)

    하지만 석도=독도를 특정짓지 못하는 건 심각한 문제가 될수도 있습니다.

    석도=독도의 명확한 증거만 있다면 일본이 다른 어떤 증거를 가져오더라도 설령 우산도가 독도가 아니라 해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일본과의 지지부진한 모든 분쟁이 깨끗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국제관계에서 선귀속조치의 힘은 막강합니다.

    이 부분에서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한발앞서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고종칙령이(1900) 먼저이지만 시마네현 고시로(1905) 경위도와 부속지도를 이용해 독도를 특정한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는 경위도는 고사하고 애매하게 석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도=독도부분은 더욱 엄격한 잣대로 고증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석, 돌, 독의 음훈변화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모바일로 작성하여 글이 두서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저도 여러자료를 검증하고 글을 적다보니 늦어졌습니다.

     

    • 이 답변은  주야에 의해 3 월, 1 주 전에 수정됐습니다.
  • #16733

    예, 감사합니다.

     

    1. 세종실록지리지

    우선 저는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다’라는 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몰라 세종실록지리지 문장을 어떻게 해석할 때 더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판단을 유보하겠습니다.

     

    주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설은 조정에서 독도는 물론 울릉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야 성립할 수 있습니다. ‘이도상거불원 풍일청명 즉가망견’이라는 표현은 고려 시대의 문헌 기록을 정리한 ‘고려사’의 지리지에서 처음 나오는데, 고려 시대에는 12세기 의종 대에 울릉도에 심찰사 김유립을 파견해 조사한 바 있으며, 이때의 조사 결과 보고는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되어있습니다. 한편 조선 전기에도 태종 대에 김인우를 안무사로 삼아 울릉도를 조사했습니다. 이 조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 것 같지만, 당시의 보고를 통해 울릉도가 한 섬이라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록을 참고하면 김인우를 파견했던 해가 1417년 즈음이고,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된 해가 1454년입니다. 울릉도에 직접 가본 이의 보고가 있는데도 내륙에서 희미한 섬을 보며 짐작한 이들의 말을 근거로 문헌을 작성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울릉도라는 큰 한 섬을 두 개의 큰 섬으로 착각해 기록했을 가능성은 매우 작다고 생각합니다.

     

    2. 안용복

    ‘내용에 모순적인 부분이 많아 한 나라의 영토를 주장하는 근거로 쓸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말씀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주야님께서는 나침반을 거론하며 확신 있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 역시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날씨가 맑고 해상에 습기가 적게 낀 조건에서는 울릉도에서도 희미하게 독도를 확인할 수 있듯이, 독도에서는 (물론 기상 조건의 영향을 받지만) 그보다 쉽게 울릉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상 조건의 영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해상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동시에 보이는 범위는 상당히 넓으리라고 생각합니다(구체적인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즉, 해상에서 독도가 보이는 위치라고 해서 주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걸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어부들이 흐린 날보다는 맑은 날에 더 먼 바다까지 나갈 거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안용복은 맑은 날에 울릉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에서 독도를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에도 독도를 2번밖에 보지 못했다고 진술한 점을 생각할 때, 어쩌면 안용복을 비롯한 어부들은 나침반이 없어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울릉도를 볼 수 있는 범위 내의 바다에서만 조업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 설령 나침반이 있더라도 정확한 방향을 찾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이론적으로 나침반을 사용해 울릉도에서 독도가 정확히 어느 방향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배가 울릉도와 독도를 잇는 직선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울릉도에서 독도의 정확한 방향을 계산하기 위해 배와 울릉도, 독도 간 거리 및 각도 등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눈대중으로 대강 방향을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오차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子山의 ‘발음’을 일본어로 표기한 단어와 동시대 조선 지도에서 나타나는, ‘대우산’에 대응되는, ‘小于山’의 발음이 유사한 것은 우연의 산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석, 돌, 독의 음훈변화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보여진다’고 하셨는데, 일단 제가 일전에 말한 설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면 그 설에서 이 명칭들은 순차적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 서로 다른 상황에서 사용된 것이므로 ‘변화’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짚고 싶습니다.

     

    조선 시대에 순우리말로 부르는 지명을 문서상에 표기하기 위해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도나 문서상에 ‘광천, 병천, 곡교천’으로 표기하며 지명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구시내, 아우내, 고분다리내’로 불렀습니다. 표기에 한자를 사용하고 호칭에는 순우리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현대에 이런 방식을 낯설게 여기는 이유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자로 표기된 이름들을 한자 음대로 부르는 습관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율도와 밤섬, 화도와 꽃섬, 계도와 닭섬이 같은 섬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독섬을 석도로 표기하는 것, 석도를 돌섬이라 읽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즉, 석도는 조정에서 새로 만들어 붙인 이름이나 새삼스러운 이름이 아니라, 울릉도 주민에 의해 불리던 독섬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박병섭 씨의 연구에 따르면, 독도가 근대에 ‘독섬’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자료로 1925년경 오쿠무라 료 진술서에서 ‘도쿠송’, 1947년 남선경제신문에서 ‘독섬’, 1948년 GHQ에 보낸 탄원서에서 ‘Docksum’, 1948년 새한민보에서 ‘돌섬’ 등이 있다고 합니다.

     

    전남 해남에는 ‘석도’라는 섬이 있는데 1899년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펴낸 조선 수로지 제2판 소안항 조에서는 이 ‘석도’에 가타카나로 ‘독쿠소무’라고 현지 발음을 병기했다고 합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독’(경남, 전남, 충남), ‘독팍’(전남), ‘돍’(경상, 전북), ‘둑’(경기)으로 돌의 방언 4가지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규원이 조사했을 당시 울릉도 주민 대부분은 전라도 출신이었고, 강원, 경상, 경기 출신이 소수 있었습니다.

     

    일본 외무성의 다케시마 웹사이트에서는 ‘석도’가 오늘날의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칙령에는 왜 ‘독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는지, 왜 ‘우산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독도’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인들이 처음 사용한 명칭입니다. ‘우산도’는 17세기 이후 울릉도 수토관들이 독도를 보지 못하고 대강 짐작해 기록을 남기며 뜻이 희미해져 19세기 후반 즈음에는 ‘우산도’가 무슨 섬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문헌들의 기록이 서로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울릉도 주민들은 이 섬을 ‘독섬’으로 칭하고 있었으며, 당시에 지역 주민들이 ‘독섬’이라고 칭하는 섬을 석도라고 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한편 독도라는 명칭은 조선에서는 1906년 이전 사용된 기록이 없으며 오직 일본의 탐사 일지 등 문서에서만 발견됩니다. 이는 ‘독섬’을 표기할 때에 그 뜻을 따라 ‘석도’라고 함이 자연스러움에도 ‘독’자를 해석하지 못해 ‘독도’로 표기했던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례가 울릉도 바로 옆의 관음도입니다. 제가 이전에 말씀드린 바 있지만, 사실 ‘독도’, 석도‘, ’독섬‘을 논하기 전에 이 ‘섬목’만 해도 울릉도 주민들은 ‘섬목’으로 불렀고 일본 기록에서는 ‘도목’, ‘서항도’ 등의 표기를 했으나 조정의 이규원은 ‘도항’으로 표기했습니다. 이는 섬 자와 목 자의 뜻을 해석하여 한자를 표기하였는가, 해석하지 못하여 음 대로 한자를 표기하였는가에 따라 갈린 이름들입니다.

     

    ‘석도’가 경술국치 이후의 공문서에서 울릉도 북면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기록을 찾아보았는데, 조선총독부의 1912년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을 말씀하신 것 같더군요. 저는 원본 자료를 찾지는 못했고, 울릉군지라고 하는 자료의 ‘조선시대 울릉도의 지명’이라는 절에서 간접적으로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1900년(강원도 울도군)

    남면-도동, 사동, 신흥동, 옥천동, 장흥동, 저동, 남양동, 석문동, 통구미동, 남서동, 구암동.

    북면-나중동, 석포동, 천부동, 평리동, 현포동, 태하동, 학포동, 죽도, 석도.

     

    그런데 이 자료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죽도’를 울릉도 북면 소속으로 적어놓은 것입니다. 주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북면이니 남면이니 하는 것은 단순히 행정구역의 명칭이지 울릉도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죽도’가 과거부터 울릉도 남면 소속이었다는 사실은 울릉도의 행정구역이 개편된 역사와 1919년 조선지지자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자료에서 ‘죽도’가 울릉도 북면에 표시된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 죽도, 석도.’ 두 섬은 오류로 북면에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울릉도 주변에 언급할만한 지형지물로는 그 당시 울릉도 주민에 의해 불리던 독섬, 대섬, 섬목, 그리고 주야님께서 말씀하신 돌섬 군락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대섬은 ‘죽도’로 칙령에 이미 언급되었으므로 석도가 대섬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섬목 역시 상당부분 바위로 이루어진 섬이라는 점을 들어 석도가 섬목일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당시에 지명을 문서상에 표기할 때에는 호칭하는 순우리말의 뜻을 따라서 한자를 사용했습니다. 이규원이 울릉도를 검찰할 때에는 이런 상식을 정확히 따라 섬목을 ‘도항’으로 표기했습니다. 섬목이 돌섬, 바위섬 등 석도를 연상할 수 있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적은 제가 아는 한 없고, 따라서 섬목이 석도일 가능성도 없습니다. 돌섬군락에 대해서는, 애초 돌섬 군락을 석도로 표기한 사례도 빈약할 뿐 아니라 울릉도 주변의 암초들과 같이 큰 섬의 해안을 따라 산개한 돌섬들을 하나의 군락으로 인식한 사례조차 제가 아는 한에는 없습니다. 애초에 칙령에서 울릉도 해안에 산개한 바위섬들을 언급하고자 했다면 단순히 한 개 섬인 ‘죽도’ 옆에 ‘석도’라는 두 글자만 병렬하는 게 아니라 부연설명을 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한편 동역도 평안도 지도의 석도 표기는 당시 돌섬 군락을 석도라 칭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바위섬들을 한데 돌섬 등으로 호칭했기 때문에 돌섬 군락에 석도라고 표기한 특수한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대한제국 칙령의 석도가 독섬이라는 것은 아무리 의심해보아도 가장 강력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명확하게 지금의 독도에 ‘석도’라는 표기를 사용한 문서상 자료가 없는 것은 분명 아쉬운 점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국제 법정에서 인정받지는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4. 고지도

    청구도의 산맥 표시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물 제1587호 조선지도의 우산도를 독도로 보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고지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섬의 위치(거리, 방위 등)를 정확히 표시하기에 어느 정도 무리가 있다는 점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거리 문제라면 지도 도첩 지면의 한계 상 독도만을 따로 표시하기 위해 지면을 더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며 한 지면에 울릉도와 독도를 함께 표시하기 위해 거리가 어느 정도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우산도가 울릉도 남쪽 혹은 북쪽에 그려져 있다는 조선 전기의 지도 중에는 지면이 부족해 울릉도 동쪽에는 섬을 그릴 자리가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동청구도의 지역도에 있는 우산도는 모양만 죽도를 닮았을 뿐, 동북쪽에 그려져 있지 않고, 울릉도와 상대적 크기 또한 실제 죽도와는 크게 어긋납니다. 자세한 것은 이 지도의 계통을 조사해봐야겠지만, 세부사항에 부정확한 부분이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윤곽선의 모양이 닮은 것은 우연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며 이를 죽도로 주장하는 것이 타당한지도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지도 상 우산도의 형태나 위치는 하나로 특정되지 않습니다. 일부는 죽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일부 자료를 근거로 여러 모호한 자료에서까지 우산도를 죽도라고 주장하는 행위는 역시 일부 자료를 근거로 다른 모호한 자료의 우산도까지 독도라고 주장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울릉도 지도 중에 우산도를 동북쪽에 그린 것은 그리 많지 않고 그중에서도 실제 울릉도와 죽도의 상대적 크기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은 적습니다. 청구도의 산 표시를 근거로 들 수는 없겠으나, 조선 말기에 들어 우산도에 산 표시를 한 지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단순 오류로 치부하기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조선 후기에 분명히 우산도를 죽도로 인식한 것으로 보이는 지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연속된 것은 아니며, 조선 말기에 들어서는 다시 우산도라는 명칭에 대하여 (특히 이전의 수토관들이 그린 울릉도 지도에서 죽도의 위치, 크기 등을 꽤나 정확하게 그린 것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죽도로 보기 힘든 섬을 그리는 것을 볼 때, 조선 말기에 들어서는 울릉도 바깥에 있는 죽도 이외의 섬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을 공산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고지도 자료가 얼마나 방대하며, 무엇을 더 신뢰해야하는지, 연대에 따라 어떤 지도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개인적인 생각을 써 놓기는 했지만, 자세한 건 공부를 더 해봐야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독도 소유권에 관한 우리나라 증거가 국제법적으로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의 문제인 것 같은데, 어쩌면 주야님의 말씀처럼 증거로 부적절한 것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따로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야님, 논쟁 중에 죄송하지만 이게 제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아 양해를 구합니다. 제가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이라 학업과 더불어 대학 준비를 해야 해 논쟁에 더 시간을 쓰기 어렵습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라도 더 공부하고 싶고, 주야님의 말씀도 더 들어보고 싶지만, 여러 자료를 찾고 검증하면서도 답변을 늦지 않게 쓰고자 노력하는 일이 점점 버겁습니다. 아마 돌아온대도 수개월 뒤, 혹은 연말 즈음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논쟁을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 #16761

    들라코거스님 글 잘읽었습니다.

    고3이면 19살인가요? 적은 나이임에도 주장을 풀어가는 과정이 합리적인것에 놀랐습니다.

    바쁘시다니 아쉽네요.

     

    1.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의 해석은 당시의 문헌, 고지도를 보고 결과적으로 풀이한 것이니 하나의 가능성으로 생각하시면 될듯 합니다.

     

    2. 안용복

    울릉도 앞바다만 생각한다면 몰라도 당시 안용복의 진술을 보면 부산에서 출발해 포항을(?) 거쳐 울릉도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 거리를 나침반없이 항해하는 건 무리입니다.

     

    3. 석도

    예로 들어주신 율도나 화도 같은경우는 예전부터의 기록이 존재하고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경우입니다.

    석도의 경우는 과거 1500년간 기록되어 온 우산도란 명칭대신 석도를 썻다는 건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울릉도에 주민이주가 시작된건 1882년입니다.

    고작 20년만에 조정에서 우산도를 석도로 호칭할정도의 인식변화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1900년의 석도(고종)=1906년의 독도(심흥택)를 입증해줄 기록이 전무합니다.

    추정자료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되지 않습니다.

     

    4. 행정구역

    죽도가 이전부터 울릉도 남면소속이었다는 사실은 처음알았습니다. (해당 자료를 찾아보려 했으나 못찾았습니다.)

    제가 본자료는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 맞습니다.

    당시 북면과 남면은 지역구분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위도상으로 분류한것이 맞습니다.

    정각이 아니라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서 남북선을 그었습니다.

    당시 지명으로 검색해보시면 북면은 북쪽에 남면은 남쪽에 위치한것을 쉽게 확인하실수 있을겁니다.

     

    4. 고지도

    고지도와 관련한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국제법상 중요한것은 경위도가 포함된 현대지도입니다.

    19세기 이후의 지도는 아르고넛 오류와 관련해 여러가지 정리되지 않은 논점들이 있습니다.

     

    ※학업에 열중하시고 원하는 대학입학도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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