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에 대처하는 태도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 - OTL ]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에 대처하는 태도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람들이 어떠한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듯하다.
첫 째,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문제를 자신이 직접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이다.
둘 째, 자신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보다는 자신보다 문제 해결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회피할 수 있다면 회피하는 방법이다.

칼 포퍼와 스테판 에셀이 선호하는 방법은 문제를 회피하기보다는 해결하는 쪽이다. 칼 포퍼는 자신이 직접 해결하는 쪽이고, 스테판 에셀은 자신이 앞장서서 문제를 직접 해결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속한 사회 구성원 다수와 함께 하는 쪽인 듯하다. ‘과학의 반증가능성 원리’로 유명한 칼 포퍼는 과학실험 원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가설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 세웠던 가설들을 행해본 다음 옳은 것을 가려내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포퍼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해결보다는 오히려 문제해결에 대해 가지는 태도이다. 그는 “아무리 해답이 만족스럽다 해도, 절대 그것을 최종적 해답으로 간주하지 말라.

여러 개의 훌륭한 해가 존재하지만, 최종적 해라는 건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해법들은 전부 틀릴 수 있는 것들이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스테판 에셀은 문제 해결만큼이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은 문제를 인식한 사람이다.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하다. 최악의 태도는 바로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라고 외치는데서 끝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참여하라”고 말한다. 분노가 진정한 참여로 변모되는 순간 모순된 사회는 바뀔 수 있다. 분노의 결과로서 참여가 있어야만 한다. 스테판 에셀이 말하는 분노는 개인의 불이익에 대한 노여움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사회구성원 다수가 함께하는 공적인 화로서 공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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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철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칼 포퍼는 절대정신의 구현을 말하는 헤겔을 비판하면서 “철학은 그 시대의 ‘판관’이어야 한다, 철학이 시대정신의 ‘표현자’가 되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즉, 시대정신을 그대로 좇는 앵무새가 아니라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이 철학자의 역할이다.
이 부분은 칼 마르크스가 말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10번 째 테제인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와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한다. 포퍼는 맑시즘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철학 본연의 역할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시대의 판관, 그리고 시대의 변혁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스테판 에셀일 것이다. 유대인인 스테판 에셀은 프랑스에 귀화하여 레지스탕스로서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싸웠고, 알제리 전쟁 중에는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또한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도 참여하였다. 마지막으로 스테판 에셀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 점령은 나치의 행태와 다름이 없다. 저항하라. 분노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스테판 에셀은 학문하는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실천하는 철학자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스테판 에셀이 세상을 떠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실천하는 철학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스테판 에셀같은 존재는 누가 있었는가?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최선의 제도인가?

칼 포퍼는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 “국민에 의한 통치라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혹여 있었다 해도 실상은 변덕스럽고 무책임한 독재정권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통치 제도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피를 흘리지 않고 현 정부를 교체할 수 형태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럴 수 없는 형태이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주의는 최선의 정치 제도는 아닐 수 있어도, 피를 흘리지 않고 현 정부를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제도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선의 정치형태는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 형태가 아닌 것은 개인의 의사가 왜곡되면서 정확히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로서 자신의 권리와 권익을 대표하는 대표자를 4년 또는 5년에 한 번만 뽑는다. 그리고 그렇게 선출된 대표자가 자신의 의사가 반하더라도 어떻게 제제할 방법은 거의 없다. 후보가 제시한 A, B, C 등 공약에서 C만 마음에 들어서 투표를 했는데, 당선된 후보가 A와 B만 공약 실행을 하고 C는 하지 않더라도 비판을 가하기가 쉽지 않는 제도가 민주주의다. 우리는 ‘시민’이기보다는 ‘유권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스테판 에셀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다. 그는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보장제, 퇴직연금제도, 공공재의 국영화, 교육권 등 제도가 있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제도가 필요하다고 본 듯하다. 그래도 잠시나마 국민이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여야지만 최소한의 국민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아닌 또 다른 민주주의에서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또 다른 민주주의를 생각해봐야 한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전체 국민 중 법조인은 0.034%뿐인데, 19대 국회의원 300명 중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 비율은 15%에 육박한다. 모든 국민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실제로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이들은 사실상 경제력과 명예, 학력 등의 자산을 가진 부류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사회에서 추첨제 민주주의 시도가 몇 해 전부터 일어나고 있다. 이는 마치 ‘시민배심원’ 제도 같은 것이다. 사실 직접 민주주의를 실시한 것으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에서도 추첨제 민주주의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었다. 추첨제 민주주의는 시민으로서 학습 능력을 배양시키고 시민의 정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제도이다. 전체 300명의 대표자 중 능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이 추첨되더라도 엄청 능력이 뛰어난 사람 역시 추첨될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능력은 선출제 민주주의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가 전문가적이 능력이 아닌 민의를 대표하는 상식을 요하는 것이라면, 추첨제 민주주의는 한 번 시도 해볼만 제도이다.

혹자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혁명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스테판 에셀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인용하고 싶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이다”라고. 현재 대의제 민주주의가 최선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음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설사 추첨제 민주주의가 실패하더라도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지 않을까.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가운데 폭력이 행해졌다면, 그 순간에도 비폭력으로 응수해야 할 것인가?

칼 포퍼는 문명사회의 특징으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포퍼와 마찬가지로 스테판 에셀 역시도 비폭력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둘 외에도 간디 등 비폭력을 강조한 사람은 많이 있다.
문제해결을 폭력으로 하는 것은 사실 해결이 아니라 일시 중지에 불과하다. 폭력적 방법은 결국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문제해결책이 되지 못 한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전제 아래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미봉책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방법으로서 비폭력을 태갷야 한다. 비폭력적인 방법을 여러 명이서 그리고 꾸준히 할 때야 말로 문제해결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딜레마는 비폭력 방법을 행하는 가운데 상대방으로부터 폭력이 들어왔을 때이다. 이때도 비폭력으로 응수 아닌 응수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당방위라는 명목 하에 폭력을 행해도 좋은 것일까? 이때 아마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 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일본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히신 분들도 애국자 반열에 오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폭력을 썼다고 해서 폭력으로 응수하는 것은 옳지 많다. 이는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 오히려 상대가 폭력을 행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비폭력적인 방법을 지속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공분을 더욱 자아내어 비폭력적 저항이 지지를 받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 ‘분노’하지 않고 ‘분개’하여 폭력을 선택해버리는 것은 결국 폭력을 행한 사람과 같은 사람이 돼버리는 꼴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Opinions

  1. hje2013의 프로필
    Lv5 hje2013 님의 의견 - 5년 전

    길지 않은 내용인데 꽤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찬반토론 주제로도 손색이 없는 물음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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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hans의 프로필
    Lv4 hans 님의 의견 - 5년 전

    스테판에셀의 분노하라 중에서 가장 공감가는 부분은 참여에 관한 부분일 것 같습니다. 무관심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적입니다. 이번 선거 투표율이 기대에 못 미치는것을 또 보면서, 제2의 세월호 사고가 언젠가는 또 일어날것이라는 우울한 예상이 되더군요.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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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안녕!의 프로필
    안녕! 님의 의견 - 5년 전

    글잘읽었습니다.

    분노는 하는데 참여로 이어지는게 어려운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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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분노하라의 프로필
    분노하라 님의 의견 - 2달 전

    현 문재인 정부의 태도에 대해 분노해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참여로 이어질지를 고민하며, 문재인 탄핵에 한 목소리를 내며 분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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