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 - 디베이팅데이 ]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하지만 어떻게 된 심판인지 사내는 그 고통스런 소리의 얼굴을 버리고는 살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 햇덩이가 뜨겁게 불타고 있지 않으면 그의 육신과 영혼이 속절없이 맥을 놓고 늘어졌다. 그는 그의 햇덩이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소리를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식으로 이날 이때까지 반생을 지녀온 숙명의 태양이요, 소리의 얼굴이었다.

적막한 시골 주막. 소리가 청청히 울려퍼진다. 애끓는 판소리 가락에 듣는 이의 마음도 오묘한 한스러움에 젖는다. ‘햇덩이’를 품고, 제 숙명의 길을 따라 방랑길에 오른 사내는 무얼 그리 찾아 헤매었던가. 그가 찾아 헤맨 소리란 대체 무엇이었던가? 글_김지나 기자

 

판소리? 예술적인 음악극!

대부분 제대로 판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판소리라? 무얼 판소리라고 부르는 걸까?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춰서 들려주는 일종의 음악극이다. 소리꾼이 서서 말로 이야기를 들려주다가〔아니리(白, 말)〕,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소리(昌, 노래)〕. 말과 노래로 얘기를 들려준다. 중간 중간에 적당한 몸짓〔발림〕도 섞어가면서. 판소리에 대해 다시 정리하자면, ‘소리꾼 한 사람이 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춰 펼치는 음악극’인 셈. 소리꾼 한 사람이 북장단에 맞춰 이야기 속 등장인물을 바꿔가면서 노래극을 온전히 끌어가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 판소리라는 말은 이러한 형식의 노래극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붙여진 이름은 아니다. 그 전에는 타령, 창, 잡가, 소리, 광대소리, 창악, 창극 등으로 불렸다. 판소리는 대략 17세기 조선시대에 등장했다. 판소리 소리꾼은 주로 하층민들이었다. 소리꾼은 천대받는 하층 계급 사람들의 설움과 애환을 과장해서 표현했고, 구경꾼들은 그들의 소리와 노래를 들으며 삶의 위로를 받았다. 판소리에는 이렇게 이야기와 노래가 섞여 있다. 그래서 문학적인 구조와 음악적인 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보통 판소리라고 말하면 ‘춘향가’ ‘홍보가’ 같은 걸 떠올릴 것이다. 이 판소리 다섯마당(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홍보가, 적벽가)은 언뜻 보면 전통적인 유교관, 도덕관을 담고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등장인물들이 결코 단선적이지 않고 이야기 구조도 엎치락뒤치락 반전을 거듭하고, 이에 따라 구경꾼들이 울고 웃었다. 판소리의 가장 큰 특징은 즉흥성이다. 준비 없이 그때그때 청중들의 반응을 보면서 즉흥적으로 ‘공연’을 했다. 민중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그래서 판소리는 민중의 소리이기도 하다.

 

한(恨)의 맺힘, 풀림, 넘어섬


 

1993년,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소란스럽게 했다. 지금처럼 멀티플렉스 시대가 아니었는데도 서울에서만 100만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완성된 ‘소리’를 향한 예술적 추구와 한스러운 가족사를 담은 이 판소리영화는 ‘서편제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판소리를 영화로 만들어낸 장인 정신’에 취하기보단, ‘한국적 한(恨)’ ‘판소리’를 대중적 코드로 삼은 점을 외려 거슬려 했고, 그 탓에 영화를 ‘좋게’ 관람하는 데 실패했다. 전염병처럼 휩쓰는 신드롬에 대한 반기 같은 것도 삐뚜름하게 섞였던 듯싶다. 세월이 꽤 흘러서야 원작 소설을 마주한다.

이청준은 한국문학 동네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선수’다. 사회현실과 정신의 대결관계를 예리하게 포착해 빛나는 언어로 명징하게 밝혀내는 솜씨가 도드라져 문단의 호평과 눈 밝은 독자의 인기를 독차지한 작가다. 하지만 「서편제」를 읽고 나선 의외로 떨떠름한 부족감 같은 게 느껴졌다. 이유를 곰곰 따져보니 우선 영화 <서편제> 탓이었다. 스포일러처럼 줄거리를 알고 읽자니 몰입도가 떨어졌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 작품이 ‘서편제 연작’의 첫 타자라 이야기의 구조를 구축하느라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을 놓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중요 인물인 사내의 운명적 한을 그리고는 있지만, 소리를 찾아 헤매는 그의 내면의식을 섬세히 그려낼 여유가 없었고, 절로 찬탄이 나오는 특유의 문장도 단조로운 서술로 그친 감이 없지 않았다.

배경지식을 보태자면, 「서편제」는 『남도 사람』 연작 중 하나인데, 여기엔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 등의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이 중에서 앞의 세 편은 인물과 내용 모두 서로 보완적이면서 후일담 형식을 취해 ‘서편제 연작’이라 불린다. 반면에 후반에 속하는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의 경우 주요 등장인물 및 상황 설정이 최소한의 공배수만 남긴 채 주변부로 물러나 있고, 다른 테마가 중심에 서게 돼 ‘서편제 연작’과는 구별된다.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 연작 세 편을 텍스트로 삼아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서둘러 다른 두 작품을 챙겨 읽었다. 그제야 ‘떨떠름한 부족감’이 조밀하게 채워졌다.

남도소리 특유의 애조와 한스러움은 있었으나 그 또한 서리 내린 가을 달밤의 기러기소리와도 같이 미려한 여인의 수수로움이 아니라,
무럭무럭 처연스럽게 가슴을 북받쳐 오르는 장부의 통한이 역연한 소리였다.
「소리의 빛」 중에서

사내가 장님이 된 누이의 소리를 듣고 난 감회였다. 이청준의 ‘서편제’(이하 서편제 연작은 ‘서편제’로, 연작의 첫 단편은 「서편제」로 표기함) 혹은 『남도 사람』은, 영화의 원작이란 자리를 꿰찼지만, 그 바람에 영화의 후광에 가려진, 아까운 작품이 돼버렸다.

 

저마다의 한(恨)을 품고 사는 세상살이


 
한데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 <서편제>를 폄훼할 수는 없다. 자료를 뒤적이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화 <서편제>의 소리 한 대목을 들었다. 허름한 주막의 작은 방, 소박한 차림새의 봉화가 소리를 한다. 서광처럼 비껴든 빛. 부스스한 머리의 앳된 여인이 토해내는 그 소리는, 쉬이 형용키가 어렵다. 소리가 성대만을 울리는 게 아니다. 몸 전체를 뒤틀며 뿜어져 나오는데, 뚝뚝 끊길 듯 토해내는 소리는 왜 그리 절박한가. 판소리 심청가의 한 자락인 듯하다. 장님이 된 봉화가 부르는 심청가는 더 애를 끓게 한다. 노랫소리에 꽉 채운 연주가 어우러진 음악만 듣던 귀가 놀란다. 연주라고는 맞잡은 장단소리와 너름새(발림). 그 여백이 단 몇 분 만에 서글픈 정조로 이끈다. 울컥, 슬픈 정조가 가만히 번져간다. 인물의 ‘한(恨)’과 소리의 관계가 직관적으로 와 닿는다.

「서편제」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내와 누이, 그의 의붓아비인 소리꾼의 한과, 그 한을 딛고 일군 소리의 예술을 그리고 있다. 소리꾼 아비는 소리에 대한 욕심으로 딸아이의 눈에 청강수를 넣어 장님이 되게 한다. 눈을 통해 열린 밖으로의 촉수를 안으로 다잡아 소리로 끌어올리려는 생각에서였던 모양이다. 그것은 아비의 한이다. 소리꾼에게 어미를 빼앗겼으나 그 소리에 매혹된 사내는 태생적 한을 지녔고, 아버지의 소리 시중을 들며 소리꾼이 된, 장님이 된 누이 역시 응어리진 한이 맺혀 있다. 그 맺혀 있는 한들이 엉기고 풀려 소리로 승화돼 터져 나오는 것이다. 작가 이청준은 「서편제」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고 어느 만큼씩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의 고향땅, 사랑하는 부모 형제, 정다운 이웃들, 자기가 지니고 누려야 할 올바른 삶의 길과 모습, 그런 것을 잃고 떠나 그것을 다시 찾아 돌아가려 늘 아프게 떠돌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한이라면 한이겠지.한(恨)은 용해될 수 없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억울함과 원망이 응어리진 마음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저마다의 한을 지니고 산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이 한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청준은, 한을 지닌 인물들을 우리 정서의 보편적 내용이라 할 한의 예술양식인 판소리 가락 위에 실어 풀어나가게 했다. 누이는 한을 삭이고 진정한 용서로 승화해 풀어냄으로써 깊은 소리를 만들어낸다. 소리를 찾아 방랑길에 오른 사내는 누이의 지난한 여정을 이해하고, 그 소리에 위로받는다. 맺힌 한을 진정한 용서로 풀어가는 과정이 바로 인간이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하나의 도정인 셈이다. 뜨거운 ‘햇덩이’를 품은 소년이, 의붓아비와 누이를 버리고 소리를 찾아 방랑길에 오른 연유도 그러할 것이고.

 

‘햇덩이’를 품은 소년


 

소리는 얼굴이 없었으되, 소년의 기억 속엔 그 머리 위에 이글거리는 햇덩이보다도 분명한 소리의 얼굴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뜨겁게 불타고 있던 그 햇덩이야말로, 그날의 소년이 숙명처럼 아직 그것을 찾아 헤매다니고 있는 그 자신의 운명의 얼굴이었다.
「서편제」 중

소년은 태생적 한을 지닌 인물이다. 소년의 어미는 아비 없는 그 아이를 고삐에 묶어 두고 밭일을 했고, 소년은 아깃적부터 이글대는 태양의 열기를, 그 ‘햇덩이’를 숙명처럼 지고 있었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여름 햇덩이가 있었다.”

연작의 첫 단편 「서편제」에서, 소리를 찾아 방랑하던 사내(소년)가 소릿재에 있는 주막집을 찾아와 주인 여자를 통해 소리의 내력을 듣는다. 그리고 그 소리의 내력 속에는 어릴 때 버린 누이와 의붓아비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들의 내력보다 독자들의 뇌리에 더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 것은 소년의 ‘햇덩이’다. ‘햇덩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한, 소리를 찾아 방황하는 사내의 여정도 이해할 길이 없다.

우선 ‘햇덩이’는 사내의 원초적 체험에서 비롯된 ‘한’이다. 사내의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는 것은 아비의 부재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사내는 어미의 한스런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 소년은 낯선 소리꾼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햇덩이가 떨어질 무렵 소리꾼은 소년의 어미를 덮친다. 소년에게 고통을 주었던 ‘햇덩이’는 이제 어머니를 취한 소리꾼의 소리와 하나의 이미지로 겹쳐지고, 이는 소년에겐 숙명적인 한이 돼버린다. 소리꾼과 어미와 소년은 함께 살았고, 어미는 핏덩이 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난다. 소년의 가슴속엔 어미를 빼앗은 소리꾼 사내에 대한 복수심이 자라는데, 그 복수심 속에는 어미를 지키지 못했단 자책도 스며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소리꾼 사내의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매혹당하곤 한다.화해할 수 없는 증오와 원한 속에서 소년은 두 사람을 버리고 길을 떠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내의 방랑길은 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왜 사내는 버리고 달아난 그 소리를 그리도 애타게 찾고 있는 걸까?

 

본래의 자리를 찾아 떠나는 한(恨)의 도정

사내가 소리 구걸을 하며 누이와 의붓아비와 살다 홀로 길을 나선 것은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사내는 주막집 여자에게 누이가 눈이 멀게 된 사연까지 전해 듣는다. 이야기 끝에 사내가 말한다. 여자가 제 아비를 용서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어쨌거나 그 여인이 제 아비를 용서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을지 모르는 노릇이지. 아비를 위해서도 그렇고 그 여자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여자가 제 아비를 용서하지 못했다면 그건 바로 원한이지 소리를 위한 한은 될 수가 없었을 거 아닌가. 아비를 용서했길래 그 여자에겐 비로소 한이 더욱 깊었을 것이고.

사내는 누이가 자신의 원한을 한으로 승화해 더 깊은 소리를 얻었으리라 짐작한다. 소리를 완성해 가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비우고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소리를 찾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누이는 소리를 통해 한을 삭일 수 있었으리라. 판소리는 ‘흥부가’ ‘심청가’처럼 주인공이 등장하고, 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이야기는 대부분 주인공이 겪어나가는 고난의 여정이다. 주인공들은 고난을 겪고, 그를 극복함으로써 행복한 결말에 이른다. 소리꾼들은 이들 이야기를 읊으며 스스로를 삭여가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디 그것이 소리꾼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랴. 이 소리로부터 위로받는 것은 오누이뿐이 아니다. 사내가 찾아다녔던 수많은 소리꾼은 소리를 통해서 자신뿐 아니라 청자를 위로해주었다. 또한 누이의 소리는 선학동의 학을 날아오르게 하는 힘을 지녔으며, 늙은 노인에게 잊혀졌던 기억을 추억하게 하는 힘을 지닌 것이다. 서편제 연작은 한의 본질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게 한다. 즉 ‘서편제’에서의 한은 원망, 혹은 비통함과 같은 어두운 정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랫동안 삭여 진정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적인 힘인 것이다.

‘한국적인 한(恨)’ 그리고 ‘판소리’, 오래전에는 식상해했던 두 키워드가 이번만큼은 제대로 마음에 와 닿는다. 몇 분간의 동영상을 통해 들은 ‘소리’ 덕분이다. 우리는 얕은 소리에 포위돼 있다. 소음에 갇혀 있는 셈이다. 1950년대의 적막한 시골길에서 울리는 소리 한 자락을 떠올려본다. 한 가락 바람결, 그 바람결에 호응하는 풀섶, 고즈넉한 자연과 천연덕스럽게 호흡하는 인간의 소리가락. 배경음악 같은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 그 여백의 소리는 틀림없이 청자의 잠재된 한마저 어루만져 주었을 것이다. 이것이 예술로서의 소리가 품은 진정성이리란 생각이 스친다. 서로를 위무하는 참된 소리.

 

이청준(1939~2008)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퇴원」으로 등단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에 주목해온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병신과 머저리」 「서편제」 「이어도」 「잔인한 도시」 「살아 있는 늪」 「별을 보여드립니다」 「당신들의 천국」 「자유로운 문」 등이 있다.

 

판소리 열두 마당

판소리는 전래하는 여러 이야기를 노래와 사설로 엮은 것이다. 따라서 구비 전승되는 설화의 숫자만큼 종류도 많았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그 가운데 열두 가지를 골라 ‘판소리 열두 마당’이라 불렀다. 판소리 열두 마당은 전하는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순조 때의 문인인 송만재(宋晩載)가 펴낸 판소리집 『관우희(觀優戱)』에서는 심청가, 춘향가, 흥부가(興夫歌), 수궁가(水宮歌), 적벽가(未壁歌),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 왈자타령, 강릉매화전, 가짜신선타령으로 꼽았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 장끼타령, 변강쇠타령, 무숙이타령, 배비장타령,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춘향가, 적벽가, 강릉매화전, 숙영낭자전, 옹고집으로 적고 있다. 왈자타령과 무숙이타령은 거의 내용이 같으니 가짜신선타령과 숙영낭자전만 차이가 난다. 지금 사설과 소리 모두가 온전하게 전하는 것은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뿐이다. 나머지 가운데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 옹고집은 이야기만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판소리 – 민중의 지혜와 삶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악, 2007. 6. 20, 현암사)

 

서편제(西便制)

철종 때의 명창인 박유전에 의해 창시된 판소리 유파의 하나. 광주·나주·보성·강진·해남 등지를 중심으로 이어져 왔는데 이 지역이 전라도 서쪽에 있다 하여 서편제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서편제의 특징은 활달하고 우렁찬 동편제와는 대조적으로 가창의 성색(聲色)이 부드러우며 구성지고 애절한 느낌을 준다. 서편제의 창법과 잘 어울리는 창으로는 <심청가(沈淸歌)>를 꼽을 수 있다. 서편제의 명창으로는 박유전·김채만·이날치·정창업·김창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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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inions

  1. hwon2242의 프로필추천댓글
    Lv3 hwon2242 님의 의견 - 1달 전

    감사합니다!

    1 0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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