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로 살아보기
일정 기간 동안 페이스북과 이별하고 있는 누군가를 찾다가 바로 그런 결단을 감행한 나의 동료 사라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지난 여름 커뮤니티의 단절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페이스북에서 사람들과 연락하는 시간을 점점 더 많이 할애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만의 시간이 너무 줄어서, 또 다른 이유로는 그렇게 맺은 관계가 어느 날 갑자기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제 문득 생각했다. 스마트폰이 아니고 그냥 핸드폰일 때는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너나없이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원하기만 하면 손 안의 스마트폰을 통해 디지털 세계로 쑤욱 들어간다. 디지털 기술은 이미 우리 삶을 점령해버렸다. 한번쯤 디지털 기술혁신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얻었으며 그 대신 무엇을 내주었는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글_김지나 기자
인터넷, 스마트폰 없이 40일 보내기
크리스토프 코흐는 독일의 인기 있는 프리랜서 기자다. 유명한 파워블로거요 파워 트위터리안이기도 하고. 이런 사람이 장장 40일을 인터넷, 스마트폰 없이 살아보기로 작정을 했다(처음에는 한달을 계획했다가 연장함). 일과 관련된 경우에도 당연히. 이 일이 가능할까? 휴대전화는 그렇다고 쳐도(이것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인터넷 없이 기사를 쓴다고? 한 달 이상을 인터넷과 스마트폰 없이 살아가야 한다면?… 재미 삼아 보는 것들이야 상관없지만, 일도 해야 하고 과제도 해야 하는데 그건 어쩌지? 스마트폰이 없으면 친구와 약속을 하고도 불안하고, 외우고 있는 번호도 몇 개 안 되니 친구들과 수다떨기도 어렵겠지. 솔직히 애인 없이는 살아도 인터넷 없이는 못살겠다는 말이 맞을 거다.
『아날로그로 살아보기』는 누구보다 디지털 기기와 친숙한 한 남자의 도전기다. 그의 좌충우돌 도전기는 어떤 면에서 우리의 짐작을 뛰어넘지 않는다. 외우고 있는 번호가 없으니 친구와 통화하려면 전화번호부를 뒤지거나 교환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이메일이 없으니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서 번번이 메모를 남겨야 하고, 여행을 가려면 인터넷 예약을 못하니 현지에서 발품을 팔아가며 방을 얻어야 하고, 구글 검색으로 간단히 해결 가능한 일을 도서관을 들락거려야 하고….
이 새삼스럽지 않은 행각을 좇다보면 갑자기 디지털 세계를 떠나는 순간 우리들 일상의 방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크리스토프 코흐는 스마트한 디지털 세계에 사느라 발치에 두었던 아날로그적인 삶을 체험해 나간다. 그러면서 묵혀 두었던, 혹은 모른 체했던 디지털 세계의 맹점을 슬쩍 꺼내 보인다. 그의 필체는 진지하거나 ‘꼰대’ 같지 않다. 그보다 가까운 형처럼 자신의 도전을 통해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게 된 것들을 재잘거리듯 떠든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대체 이 남자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슬며시 헛갈린다. 다 알고 있는 얘기를 떠드는 것도 같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건성건성 읽다가 어느 순간 그의 평이한 문제제기가 의외로 날카롭게 내 안에서 하나의 물음을 던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도 현명한 네티즌이 되어야겠다든지, 혹은 그러기 위해서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여타의 원론적인 디지털 비판서보다 소박하지만 진실성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긍정하게 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나는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디지털 원주민)’가 아니다. 어린 꼬마가 아빠에게 물었다지? “아빠, 컴퓨터가 없을 땐 어떻게 인터넷을 했어?” 요 꼬마가 바로 디지털 네이티브다. 디지털 제국에 태어난 디지털 키드. 이 책을 보니, 자전거에서 텔레비전에 이르는 모든 기술문명에 대한 두려움에 대처하는 유형이 세 가지라는데, 그 분류가 눈에 띄었다.
첫째,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존재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상적이다. 둘째, 출생에서부터 30세 이전에 발명된 것은 놀랍도록 흥분되고 창의적이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다. 셋째, 30세 이후에 발명된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의 종말을 뜻한다. 그것이 약 10년 이상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과 천천히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고백컨대, 나는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디지털 네이티브’와는 꽤 거리가 있는 세대다. 처음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도 별로 열광하지 않았고, 소셜네트워크 따위를 하는데 내가 시간을 허비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전형적인 구세대다. ‘가상의, 디지털적인, 익명의’ 관계는 인스턴트 라면과 같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스마트폰을 모시고 산 지 어언 몇년. 굳건했던,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인간인 내가 ‘변했다’. 소셜네트워크에 안착한 느낌과 동시에 손 안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지 않으면 희한하게 불안하다. 만일 배터리가 충분하지 않거나 인터넷 연결이 어려운 해외에 있을 때면 더 강렬하게 집착하는 나를 발견한다. 괜히 스마트폰을 터치해 메시지, 카톡, 페이스북 친구들이 날 찾고 있지 않은지 확인한다. 그러다 가끔 묘한 결핍감 같은 것도 뒤따른다. 아무리 봐도 나답지 않은 행동들이다. 나는 이런 변화를 겪으며 꽤 피로감을 느꼈다.
디지털 키드의 속도를 뒤쫓는 일이 조금은 재미있고 신기했지만, 한편에서는 내 안에서 상반되는 가치관들이 충돌했고, 그 충돌이 일으킨 긴장들로 피로했다. 디지털이 선물한 속도, 편리함이 좋기도 했고, 숨 가쁘기도 했다. SNS 초기에는, 능수능란하게 소셜네트워크에 안착한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한심해 보일 때도 있었다. 여기저기 내세운 사람들의 장황한 프로필에 괜히 주눅이 들 때도 있었고(젊고, 잘생기고, 예쁘고, 스펙이 좋은), 그런 내 어리석음이 밉상스럽기도 했다. 그저 디지털 기술의 혁신이라는 현상일 뿐이건만, 내가, 내 삶이, 가치관이, 일상의 방식 전체가 총체적으로 휘둘리고 있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인터넷 제국의 주민인 ‘네티즌’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고, 분신과도 같은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많은 친구들과 ‘접촉’할 수 있다. 이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 있나? 네티즌인 당신에게 온라인 네트워크란 어떤 의미인가? 당신은 전혀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나? 만일 디지털 현기증을 느낀 적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얼까? 나는 어떤 ‘네티즌’으로 살 작정인가? 한번쯤은 스스로에게 묻고, 자기만의 현명한 선택에 도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늘 SNS로 소통하니 실제로 친구를 덜 보는 건 아닌지…
『디 차이트』 『슈피겔 온라인』 『파이낸셜타임스』 등, 독일의 유력 일간지 및 잡지사에서 인기 프리랜서 기자로 맹활약 중인 저자는 한달 동안 인터넷, 스마트폰 없이 살아보기로 작정했다.(나중에는 40일로 늘어났다) 이 결심은 순전히 이사를 간 집에 아예 전화선이 설치돼 있지 않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고(?) 때문에 시작됐다. 디지털 문명과 한몸으로 살아온 코흐는 이 일로 새로운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만약 일정한 기간 동안 ‘네티즌’ 공동체와 관계를 끊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온라인 활동을 그만둔 뒤 무언가 좀더 나은 걸 얻게 될까? 한 달여 동안 인터넷, 스마트폰 없이 살기란 어려우니 우리는 그냥 상상만 해보자.
인터넷을 끊는다고? 그러면 카톡, 문자메시지,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친구들과도 자연히 연락이 끊길 것이다. 알고 싶은 것들을 검색해볼 수도 없고. 스마트폰이 없으니 심심풀이 땅콩 삼아 나누던 친구들과의 잡담도 어려워지겠지. 아마 며칠만 그러고 있어도 덜렁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 거다. 무언가 중요한 걸 놓쳐버린 것 같고, 뭔가 결여된 기분일 것이고, 덩달아 내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황당한 기분에 빠질 것이다. 지은이처럼. 갑자기 소통의 채널이 닫혔을 때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외로움에 부닥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트로 하는 소통이 불충분한 면이 있더라도 말이지. SNS에서는 내가 정말 힘들 때나 나쁜 일이 생겼을 때 말도 못하고 그냥 조용히 사라져버리게 된다. 소셜네트워크의 가상 친구들은 좋은 치과나 괜찮은 디카를 추천받을 때는 훌륭한 도움이 되지만 말이다.
아, 그렇다고 당장 가상의 친구에게 쏟을 관심을 오프라인 친구에게 쏟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 결론은 사실 너무 비현실적이다. 페북을 통해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농담도, 순발력있게 오가는 안부도 모두 우리 일상의 일부분으로써 제 구실을 한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만난 친구가 오프라인 관계로 이어지는 건 그냥 사회생활을 하다 만난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도 하나 신기한 건 있다. 과거보다 네트워크 그물에 더 많은 인간관계들을 엮어두고 있는데도 항상 연락이 닿기를 원하는 인간의 욕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몇몇 친구들, 친지들, 가족들, 동료들로도 충분했는데 말이다. 결여감, 소외감, 혹은 소통에 대한 갈증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충분한 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소셜네트워크에 쏠려 있던 시간과 노력을 잠시 덜어서, 혹은 가끔 접어두고 가족 혹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보면 뭔가 답이 나올 듯도 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검색
인터넷의 마력이란, 궁금증이 머리에 떠오르는 그 순간 또는 발코니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가 질문을 던진 그 순간 곧바로 답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말해 뭣하랴. 인터넷 중독자인 우리에게 검색은 쾌감이다. 세상에 모든 것을 몇 초 만에 알아낼 수 있다니. ‘검색 본능’이 새로운 유전자로 새겨질 기세다. 인터넷 검색은 언제나 황홀하다. 맛집을 찾고 여행 정보를 얻는 것뿐 아니라 일을 위한 지식, 혹은 단순한 호기심을 순식간에 해결해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정보를 얻기 위한 이런 검색들은 애초의 목적이 달성됐는데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검색으로 이어지고는 한다는 것. 우리는 계속 뭔가를 ‘클릭, 클릭…’하고 있다!
책을 보니 그 이유가 의외다. 검색창에 무언가를 입력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때에 우리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된단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도파민 분비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시시껄렁한 정보들을 섭렵해나가는 이유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이 도파민 시스템에는 멈춤 신호가 없다. 저자가 인터뷰한 한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도파민 시스템은 불행히도 만족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잘 알고 있다시피 우리는 결코 우리에게 이롭지도 않은 비이성적이고 도가 지나친 욕구를 지속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무제한으로, 혹은 최소 한 시간 이상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검색어를 꼬리에 꼬리를 물며 찾아다니는 일이 잦다. 우리는 이때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얻었을까?… 회의적이다.
‘스마트한’ 삶의 속사정
코흐의 ‘짧다면 짧았던 40일 유배생활’은 끝이 났다. 그는 드디어 네트워크에 접속했고, 1024통의 메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대략 하루에 100통 정도의 이메일을 받아왔으므로 그리 끔찍한 숫자는 아니었단다.) 메일을 천천히 확인해가면서 그가 알게 된 것은 답신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답변을 절실하게 기다린 사람이 없었단 사실이다!
나는 일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러다 보니 다소 부끄러웠다. 지금 이렇게 그 많은 수의 메일을 확인하고 있으면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혹은 나에게 의미 있는 메일을 단 한 통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혁신은 분명 우리의 삶을 ‘스마트’하게 탈바꿈시켰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놀다가도 호기심거리가 생기면 단 몇 초 안에 인터넷을 통해 그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인터넷은 늘 우리와 함께 하니까. 그런데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진짜배기는 슬그머니 모습을 감춘 경우가 많다. 이메일은 쏟아지지만 따뜻한 편지는 없고, 소셜네트워크에 혼잣말을 중얼거려 보지만 소외감을 감싸줄 ‘소통’은 부족하고, 정보는 차고 넘치지만 그 중에서 진짜 정보를 가려줄 여과기는 없다. 확인할 메일이 수백 통이고, 소셜네트워크에 수천 명의 친구를 두고,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도중에도 쉴새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언제 어디서든 태플릿 PC, 노트북을 켜놓고 일하고…. 이런 모습들은 스마트한 삶을 살아가는, 능력 있는 현대인의 표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빈 구멍이 뻥 뚫려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실험기간 동안 취재차 아미시 마을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기술문명을 거부한 채(마을 공동의 전화기가 외곽에 한 대 놓여 있을 정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조금 많이 ‘별난’ 사람들이다. 눈에 띄는 모자를 쓰고 마차를 타고 다니는.
지금 같은 세상에서 이런 선택은 절대 쉽지도 않고, 굳이 이런 방식의 삶을 선택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새로운 기술문명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만큼은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을 만나면 그 기술이 기존 삶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어떤 변화를 몰고 오는지 세밀히 관찰한 다음, 그 기술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한다고 한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쏠려’ 있는지 알고 있긴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 안식일(오프라인 데이, 아날로그 데이)이 필요하다
“인터넷에는 교육을 받기에 좋은 장소도 있고, 아이들의 영혼을 파괴시킬 정도로 나쁜 곳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커다란 아이지요. 너무나 나약하고, 고속도로에서 잘못 추월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많은 규칙들을 필요로 합니다.”
코흐가 만난 유대인 랍비의 말이다. 우리 모두 커다란 아이란 말, 수긍하고 싶지 않겠지만 지금의 우리 모습을 조금 거리를 두고 관찰해보면 우리는 정말 ‘커다란 아이’ 같은 행동을 많이 하고 있다. 재미에 빠져 위험한 줄 모르고 노는 아이처럼 우리는 스마트한 디지털 기술이 안겨준 속도에 정신없이 빠져 있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으니까. 디지털 혁명은 분명 우리의 삶을 편리하고 빠르게 만들어주었고, 덩달아 우리 생의 템포는 너무 빨라져버렸다. 여러분은 이 템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커다란 아이’가 아니려면 빠른 템포와 느린 템포를 자유롭게 변주할 수 있는 지휘권을 내가 쥐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예의 그 유대인 랍비는 안식일에 컴퓨터 사용을 금기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해도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스스로를 위해, 나의 영혼과 믿음, 그리고 나의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코흐는 그를 만난 다음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는 이 도전을 무사히 끝내더라도 스스로 규칙을 정해 일종의 인터넷 안식을 가져보겠다는 것, 또 하나는 내가 쓰는 글과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음식 주제를 많이 활용해야겠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니 ‘온라인 활동을 그만둔 뒤 무언가 좀 더 나은 걸 얻게 될까?’라는 코흐의 최초의 호기심에 대한 답은 찾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온라인 생활이 시작된 일요일, 자신의 애인이 침실에서 나올 때까지 컴퓨터에 코 박고 있는 대신 맛있는 차와 식사를 준비해놓은 걸 보면. 인터넷 안식일은 코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커다란 아이’들에게도 필요해 보인다. 물론 나도.
이메일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매일 약 2억 5천통의 이메일이 발송되는데 이는 1초당 3백만 통에 달한다. 그중 사람들이 절대로 원하지 않는 스팸 메일의 양은 놀랍게도 전체의 90내지 97퍼센트에 달한다. 그러니 전자우편함을 가득 채우는 메일 중에서 정말로 의미 있고 진정한 의사소통 수단으로써의 이메일은 거의 없단 뜻이다. 하루에 50통의 진짜 이메일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이메일을 약 1000통 가까이 걸러내야 한다.
또한 이것은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스팸 메일을 제거하기 위해 투자되는) 환경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전문가들이 추정하길, 스팸 메일을 걸러내고 수신을 차단하고 폐기하기 위해 매년 330억 킬로와트의 전력이 소모된다고 한다. 이것은 독일의 3인 가정 사용량의 8백만 배에 달하는 양이다. 스팸 메일을 배기가스로 환산하면 310만 대의 자동차가 뿜어대는 것과 같다. 『아날로그로 살아보기』 156, 157쪽
크리스토프 코흐
『디 차이트』 『슈피겔 온라인』 『파이낸셜타임스』 등, 독일의 유력 일간지 및 잡지사에서 인기 프리랜서 기자로 맹활약중. 1974년 독일 뮌헨 출생. 독일의 파워 블로거인 동시에 파워 트위터러이며,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어젠더를 만들어가고 있다. 자신이 쓴 기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개인 홈페이지 www.christoph-koch.net를 운영하고 있고, 2006년 그 글들에 나와 있는 여러 통계 숫자와 부호들로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여 쓴 책 『계산해주세요』는 큰 화제를 모았다.
Opin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