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 - 디베이팅데이 ]

20여 년 전 전혀 새로운 청춘멜로 <중경삼림>을 다시 보다

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에선 홍콩영화가 무척 인기였다. 장국영, 유덕화, 왕조현 등 지금은 중년이 되어버린 배우들이 한국의 아이돌 스타였다. 마치 요새 한류 배우를 해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까마득한 옛날 같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글_유인서 기자

 

 

왕가위 감독이라고 들어봤는지? 90년대 중반부터 그는 ‘전혀 새로운 영화’ 신드롬을 일으키며 대표작 <중경삼림>을 우리나라의 유행사조로 만들었다. 텔레비전의 광고나 한국 영화계에서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스텝 프린팅’이나 ‘헨드헬드 워크’ 촬영을 들여오며 낯설지 않은 영화기법이 되었다. 좀 영상에 멋을 낸다 싶으면, 여지없이 ‘왕가위 스타일’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들

그런데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따르는 그 ‘대단한’ <중경삼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현란한 영상의 이미지들 밖에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붉은빛과 푸른빛, 강렬한 노랑의 네온사인, 정착하지 않는 시야…. 솔직한 마음으로 이 너무나도 낯선, 마치 정신없는 뮤직비디오를 2시간 동안 본 것 같은 어질함과 의미 없는 스토리에서 어떠한 감동이나 재미를 찾는 것은 무리였다. ‘뭐 이따위의 이미지에 치우친 영화가 다 있어!’하며 적응력과 이해력이 극히 부족한 나는 매우 화를 내면서 영화를 보다 말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가 15세 여름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곧바로 대학에 가지는 못했다. 재수라는 기간은 내가 겪었던 외로움의 총체였다. 소속된 곳이 없다는 불안감과 내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불만족, 어찌 될지 모르는 미래에 관한 두려움이 모두 결합되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외로움으로 바뀌었다. 그때 관심을 돌린 것이 미술과 사진이었고, 아름다운 영상과 이미지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중경삼림을 보았다. 전과는 달리 매력적이었다. 그 이야기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의 나의 심리상태가 그러했듯이 주인공들은 어딘가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해 바다 위의 해면체같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고, 커다란 도시 안에서 또 다른 세계로의 갈망에 목말라 했다. 그 완전한 공감에서 비롯한 호감으로, 난 거의 이 영화에 반해버렸다. 15세의 여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들이 이제는 마음속 깊이 이해되고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어른이 되었다는 것일까?

 

부족하고 엇갈리는 청춘들

중경삼림의 인물들은 모두가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이다. 상실감에 빠져서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심리상태를 보이고 있다. 양조위가 왕정문이 주는 편지를 읽지 않고 커피를 마시는 장면에서 주위 군중들은 매우 빠르고 정신없게 지나치는 반면에 주인공들은 매우 느린 속도로 커피를 마시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여기서 인물들은 주변에 절대 동화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래서 그들 자신을 향해서만 열려있는 각자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 장면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결국 자기 혼자라는 느낌을 가지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보게 된다.

실연을 당한 두 남자는 5월 1일까지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다 먹어야 한다는(여기서 파인애플 통조림은 그의 연인이 좋아하던 것이고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먹는 것은 그 사랑을 잊을 것이란, 마치 의식과도 같은 행동이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고, 떠나간 연인의 흔적들과 그리움을 비누와 수건, 곰 인형에게 토로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두 여자가 등장한다. 한 여자는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흥얼거리며 이 세계와는 분명히 다를 캘리포니아를, 또 다른 세계를 꿈꾼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옛 연인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나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용기는 없기에, 자신의 사랑을 ‘몽유’라 표현하면서 빨리 깨길 바란다. 또 다른 여자는 마약 밀거래를 하면서 항상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다. 그럼에도 선글라스와 레인코트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녀 역시 어쩌면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쫓김의 불안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 네 인물들은 각자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간다.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서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지는 우리 자신이, 거기에 그려진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중경삼림>에서는 ‘기한’이라는 개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금성무는 시간에 대해 집착한다. ‘57시간 후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이 여자는 6시간 후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에 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정하리라’ 등등….시간으로 자신의 의지를 자꾸만 상정하는 모습은 그밖에 다른 것들은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시간에 얽매이고 쫓기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시간으로부터의 쫓김은 당시의 홍콩사회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1842년 홍콩을 영국에 영구 할양하였고,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카오룬 반도마저 1860년 영국령이 되었다. 1898년, 영국은 홍콩과 그 주변 도서 및 해역을 아우르는 “신계(新界)” 지역을 99년간 임차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이 영토는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홍콩은 자유항구이자 대영제국의 무역 중심으로 무역 거상들에게 어마어마한 부를 안겨주었다. 홍콩인들은 부유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으나 중국인 주민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런데 99년의 임차 시기가 끝나가면서, 홍콩인들은 1997년이 되면 공산체제 안의 중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두려워하며 혼란에 빠졌다.

그 시대의 홍콩을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왕가위 역시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홍콩인들의 심리를 중경삼림에서의 금성무의 시간에 대한 집착으로, 또 다른 영화 <아비정전>에서의 그 수많은 시계들로 표현했을 것이다. 어쩌면 ‘기한을 정한다면 만년으로 하리라’라는 말은 199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 당시 3년 앞으로 다가온 홍콩 반환을 늦추고 싶은 홍콩인들의 마음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뭉툭한 감각을 깨울 새로움 찾기


 

나는 공식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영화를 만든다. 어떤 평론가들은 내 영화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른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내 영화는 홍콩 같은 도시에서 삶에 대해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뿐이다.
어쩌면 중경삼림은 홍콩 그 자체이다.
왕가위 인터뷰 중

<중경삼림> 이 이른바 ‘새로운 영화’로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훌쩍 지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뭐다 말도 많았던, ‘새로운 문화’이기도 했다.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한다는 지금, 우리는 어떤 새로운 것들을 취하고 있는 것일까? 그야말로 매일매일 새로움이 물결처럼 닥치는 것 같다. 생전 처음 보는 흥미로운 것들이 인터넷을 연결하면 끊임없이 보인다. 그런데 너무 흔해서일까? 오히려 무덤덤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열다섯 살 때 느꼈던 낯선 위화감이나 스무 살 때 느꼈던 매혹을, 요즘의 새로운 물결 안에선 찾기 힘들다. 예민한 촉은 뭉개지고, 빨라지는 변화의 속도에 그저 끌려가고만 있다. 그래서 문득, 다시 이 영화를 꺼내서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좌충우돌하고 외로우며, 정처 없이 헤매는 청춘들의 모습을 보면서 20년 전 느꼈던 새로움을 느끼고 싶어서. 왕가위 감독은 인터뷰에서 자신은 어떤 복잡한 의도 없이, 자신이 느끼는 ‘홍콩’을 표현했다고 했다. 즉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영화는 그 시대 자체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0년대의 시작은, 오히려 1990년대 중반보다 새롭지 않은 것일까? 새로움이 매일 쏟아지는 현재가 문제인지, 점점 둔감해지는 내 자신이 문제인지, 한참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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