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 디베이팅데이 ]


《장미의 이름》은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500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다. 이토록 사랑받은 이유가 뭘까?
‘이름’과 같이 본질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스스로와 타인을 괴롭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해주어서일까. 글 박지니 기자
 

 

중세 교회, 진리라는 이름에 취해 타락하다

유럽의 ‘중세’란 일반적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를 말한다. 보통 이 시대는 어두침침하며 폐쇄적인 사회로 기억된다. 왜일까?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하고,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을 공부하며 학문을 다지고, 수학과 과학 등 이슬람 세계의 지식도 차근차근 받아들였던 때인데.

중세에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종교관이 확고했다. 하느님과 성경 말씀이 1순위였는데, 당시 교회는 ‘성경은 라틴어로만 읽고, 사제들을 통해서만 들어야 한다’는 규율을 내세웠다.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몇 안됐으니 지식을 독점한 성직자와 왕족들은 막강한 권력을 손에 움켜쥐었다. ‘진리의 대리자’라는 명분을 앞세운 중세 교회는 빠르게 타락해갔다. 성직 기구를 비판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몰렸다. 사제들은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지만, 십일조소득의 십분의 일을 신에게 바치는 구약성서의 관습를 품위유지비로 사용하고 사치를 부리는 등 악습이 나타났다. 교회의 탐욕은 점점 커져갔다. 세속 권력의 편의를 봐주고 뒷돈을 챙기기 일쑤였으며 성직매매도 빈번했다. 심지어 성직자가 정부를 두는 일도 잦았다.

타락한 교회에 맞서 청빈과 금욕을 강조하는 신앙 무리가 여럿 일어났지만, 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처단했다. 혁명 세력에게 이단 낙인을 찍으면서 권력을 보호한 것이다. 중세를 거치며 타락한 교회는 결국 심판을 받는다. 1517년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의 수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자,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며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시기 성경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며 지식의 독점이 사라졌고, 성직 기구는 자연히 힘을 잃는다.
자신들이 진리인 줄 알고 권력에 취해 타락했던 중세 교회. ‘유일한 진리’에 집착하면 스스로를 좁은 시야 안에 가두게 되는구나 싶다. 소설 《장미의 이름》에도 ‘유일한 진리’를 추구하다 파멸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이 믿은 진리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1483~1546)는 1505년 초자연적인 경험을 한 뒤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며 성직자나 교황 등 인간이 아닌 그리스도의 진리만을 믿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다. 1517년 루터는 면죄부 판매 등 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고, 결국 1521년 교회에서 파문 당한다. 그러나 특권층의 종교적 권위를 반대하는 그의 이론은 1520년대 불꽃처럼 번져 나갔고, 1530년대 칼뱅에게 이어져 종교개혁의 초석이 되었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장미의 이름》은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중세 이야기라니 지루할 것 같지만 웬걸, 무척 흥미진진하다. 사실 이 작품은 엄격한 중세 사회의 규율을 피해 교묘하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그린 재미난 추리 소설이다. 이야기는 백발의 수도사인 ‘아드소’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시작된다. 14세기 초, 어린 수련사였던 아드소와 그의 스승 ‘윌리엄’은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한 수도원에 머물게 된다. 윌리엄은 셜록 홈즈의 조상 같은 인물이다. 그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하기를 즐긴다. 수도사인데도 신앙보다 이성을 앞세울 때가 많으며, 이교도 문화에서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주창한다. 중세 시대 수도사치고는 상당히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다(심지어 영국인이다. 정말로 셜록 홈즈가 아닐까?).

이들이 도착한 수도원은 아주 난리법석이다. 수도사 한 명이 ‘괴상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 수도원장은 명석한 윌리엄에게 사인(死因)을 밝혀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목숨을 잃는 수도사가 연달아 나오며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이윽고 수도원의 꺼림칙한 비밀이 하나 둘 드러나는데….

 

 

 

장서관이 지식을 가두는 곳이 되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유독 눈에 밟히는 장소가 나온다. 바로 수도원의 ‘장서관(藏書館)’. 어딘가 미심쩍은 인물은 전부 장서관을 거치니 참 의심스런 공간이다. 이곳을 샅샅이 조사하면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그럴 수 없다. 장서관은 출입 제한 구역이다. 책을 필사하는 수도사도, 고전을 연구하는 수도사도 장서관에는 발끝 하나 들여놓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책을 읽느냐고? 우선 책 목록을 살펴보고 사서에게 빌리고 싶은 도서를 얘기한다. 그러면 수도사가 읽기 적합한 책인지 아닌지 검열한 다음 가져다준다. 불경한 도서(이교도 전설이나 지식 등…)라고 판단되면 대출이 불가하다. 나쁜 책은 수도승의 정신을 해치기 때문이란다. 수행을 하며 책도 마음껏 못 읽는다니, 숨이 턱 막힌다. 심지어 연구를 하는데도 검열을 거친 자료로만 공부해야 한다니?

지식이란 물과 같지 않을까.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어버리듯이, 지식은 수용하고 해석하는 이가 없다면 금방 잊힌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책만 허용하고 사서가 보기에 불경한 책은 은폐하면 학문이 과연 발전할런지? 심지어 여기선 성경조차 자유롭게 공부하지 못한다. 하느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면 원래 의미가 흐려지니 그대로 보존하면 족하단다. 이곳 장서관은 책이 박제되어 죽어가는 표본실이나 다름없다. 지식을 널리 펼쳐야 할 장소가 도리어 꽁꽁 감춰놓은 곳으로 변해버렸으니… 이러한 상황을 본 윌리엄은 말한다.

지식이 우둔한 자를 밝히는 데 쓰이지를 않고 다른 지식을 은폐하는 데 쓰이고 있으니 이 아니 한심한 일이냐?

 
 

완전 불변한 진리라는 허상

수도원에는 장서관 출입 금지 말고도 독특한 규칙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웃음 금지’다. 조금이라도 농담이 오가면 곧바로 벼락같이 야단맞는다. ‘웃음은 육체를 뒤흔들고,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인간을 원숭이와 비슷하게 만들’어서 쓸데없기만 하고 불쾌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웃음은 인간의 본성이다. 한바탕 실컷 웃으면 머릿속 묵은 때가 날아가고 기분 전환이 된다. 또한 우리는 웃으면서 사회 현상을 깊게 이해한다. 풍자와 해학으로 중요한 사회 담론을 가볍게 술술 되짚어보고 성찰하니까.

사실 이 수도원에서 웃음을 배척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원죄를 지었으니 함부로 웃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는데, 이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섬겨야 하는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태도라고. 중세 수도사들은 ‘웃음 금지’가 인간의 숙명인줄 알고 따랐다. 하지만 그 시절 진리나 다름없던 규율은 시간이 지나며 폐기됐으니 완전 불변한 ‘진리’가 아니었던 셈이다.

비단 ‘웃음 금지’ 말고도 인간이 진리라 믿어온 수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중세 시대 천동설(天動說)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였다. 오늘날 천체가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도 안다. 20세기 초 우생학자들은 순수한 피인 ‘A형’이 유럽인 혈액형 비율에서 많이 나타난다며 유럽인이 우수한 인류라고 주장했다. 물론 A형이 우월한 혈액형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고 과학이나 진배없던 우생학은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진리라고 믿는 것들도 훗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엉터리인 것이 얼마나 많을지! 아무리 시대가 변하여도 유일무이할 진리는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뿐이지 않을까? 하기야 이마저도 미래에 영생을 누리는 기술이 개발되면 틀린 말이 될 테다. 그러니 진리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억압하는 행위는 얼마나 부질없는지.
저자인 움베르트 에코는 ‘현대는 새로운 중세’라고 덧붙였다. 대다수 현대인은 합리적으로 사고하지만, ‘합리적인 자기 생각’에 오류가 없을 거라는 함정에 빠진다. 그래서 자기 편견을 진리라 여기고 타인에게 강요한다고. 모쪼록 진리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지식과 진리, 권력의 손발이 되다

지식과 진리는 분명 문명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인류는 진리나 다름없는 자연 법칙과 성현의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를 이룩했다. 하지만 지식과 진리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탄압해온 역사 또한 얼마나 긴지! **미셀 푸코는 권력자들의 입맛에 따라 어떤 지식은 진리로 여겨지고, 어떤 지식은 거짓이 된다고 설명했다. 지배 계층은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사회 담론을 만들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로 지식을 취사선택하여 이용한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지식과 진리를 추구해야 할 수도원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다. 장서관에 출입하는 일부 수도사는 지식을 독점하고, 학문적 근거를 토대로 자기주장을 정당화한다. 또한 ‘웃음 금지’라는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성경 말씀을 진리로 내세워 사람들을 통제한다. 그러니 이 수도원의 지식과 진리는 하느님 말씀이 아닌, 권력을 지키기 위한 법칙인 셈이다. 권력을 지닌 수도사는 기존 지식을 의심하며 새로운 가치를 찾아나서는 수도승, 즉 권력 대항 세력이 나타나면 이단이라 몰아세우고 징벌한다.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지식과 진리라는 쌍두마차를 모는 이가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마차가 어느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지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의 철학자로, 개별적인 현상을 역사적 맥락과 연결 지어 파악했다. 지식이 영구불변하는 진리가 아니라 관습과 권력의 틀 안에서 재단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표작으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광기를 정상/비정상 틀 안에 가두는 현상을 주목한 《광기의 역사》(1961), 시대별로 ‘진정한 지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거대 담론의 정체를 밝히는 《말과 사물》(1966), 정보 통신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은밀하게 개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현대 권력을 고발한 《감시와 처벌》(1975)등이 있다.

 

 


 

장미의 이름이란?

그런데 책의 제목인 ‘장미의 이름’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줄거리와는 딱히 연관이 없으니 궁금하다. (사실 제목만 보고는 중세 수도원 이야기일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많은 사람이 제목의 뜻이 뭔지 질문했지만, 움베르트 에코는 저자가 제목을 풀이하면 다양한 해석을 막는다며 답변을 삼갔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그 이름을 뒤로 남긴다. 이름은, 언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하다가 그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까지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에코가 남긴 글을 읽으니 어구 하나가 생각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장미는 백합이라 불러도, 제비꽃이라 불러도, 심지어 강아지라고 해도 그 본질이 똑같다. 장미의 이데아 참된 실재는 ‘장미’라는 이름 너머에 있다. 이름은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고 다른 이와 소통하기 위해 만든 약속일뿐, 본질이 아니니까. 결국 에코가 말하는 장미의 이름이란, 어떤 사실이나 실체와 매우 가까워서 우리가 진리 자체로 오해하는 무언가를 뜻한다는 생각이 든다. 소통을 위한 도구인 이름을 진리로 착각하여, 어느 한 본질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게다가 ‘장미’라는 이름을 듣고 떠올리는 본질마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누군가는 분홍 장미 꽃다발을, 다른 누군가는 장미 비누 향기를…. 그런데도 자기 생각만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기는 태도는 얼마나 위험한지. 그래서 아드소가 이야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나 보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중세부터 현대까지 깊이 살펴본 학자,움베르트 에코 (Umberto Eco, 1932~2016)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 역사학자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부터 현대 가상현실 담론까지 다양한 학문을 오가며 심도 깊게 연구했다. 특히 문화 수용자가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요인을 고려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는다는 해석기호학 이론으로 저명해졌다. 대표작으로는 《일반 기호학 이론》(1975),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1976), 《장미의 이름》(1980), 《푸코의 진자》(1988)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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