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쥐와 인간

[ - 디베이팅데이 ]

대공황의 모진 바람에 땅을 잃은 일꾼들이 이 농장 저 농장을 전전하며 미래도 없는 삶을 이어간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노동을 하면서 인정조차 메말라버린 뜨내기들의 숙소에서 레니와 조지는 서로를 의지하며 소박한 꿈을 키워간다. 아이처럼 순수하고 어수룩한 거구 레니와 작지만 차돌멩이처럼 야무진 조지. 이 떠돌이 노동자들은 과연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 신기루처럼 레니도, 둘의 미래도 사라진 자리에 조지 혼자 덩그마니 서 있다. 글 김지나 기자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빚은 리얼리즘 소설

인간이란 아는 것도 없이 알량한 지식에 기대 많은 것을 재단한다. 일종의 선입견이다.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의 작가 존 스타인벡. ‘존 스타인벡은 노동자 출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미국 작가고, 그의 작품들은 미국 노동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정도가 내가 아는 지식의 전부였다. 나의 이 알량한 지식은, 리얼리즘에 충실한 그의 작품이 무겁고 딱딱하고, 계급 문제가 전면에 부각된 날선 작품일 것이고, 따라서 틀림없이 지루할 것이다, 라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생쥐와 인간>은, 나의 재단이 참으로 섣부른 것임을 통감하게 했다. 날카롭게 본질을 파고드는 그의 리얼리즘이 서민적인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휴머니즘적 문체로 색다른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겠는가.

1937년에 출간된 <생쥐와 인간>은 미국의 대공황(1929년) 당시, 캘리포니아의 샐리더스 지방을 배경으로 조지와 레니라는 떠돌이 일꾼의 고독한 삶과 좌절된 꿈을 그린 소설이다. 아이 같은 순수함을 지닌, 조금 모자란 레니와 그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작고 영리한 조지, 한때는 뛰어난 양치기 개였지만 이젠 늙고 병들어 쓸모없어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늙은 일꾼 캔디와 말에 차여 등이 굽은 외톨박이 마구간지기 흑인 크룩스, 솜씨 좋은 마부 슬림… 이들은 모두 ‘생쥐’보다 나을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었다. 스타인벡은 책의 첫머리에 로버트 번스의 시 <생쥐에게>를 옮겨놓았다.

하지만 생쥐야, 앞날을 예측해 봐야 소용없는 건/너만이 아니란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일이 제멋대로 어그러져,
고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하잖니!

왜 책의 제목을 ‘생쥐와 인간’이라고 했는지 알게 해주는 이 시는, 소설을 다 읽은 후 다시 읊어보면 훨씬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참 대조적으로 보이는 레니와 조지. 이들은 앞날이 없는 다른 일꾼들과 다르게 소박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 꿈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벅찬 순간을 맞기도 한다. 하지만 그 꿈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소박한 미래에 대한 꿈도, 의지하며 살았던 레니도 사라진 자리에서, 조지가 통렬하게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Angry Thirties, 그리고 떠돌이 노동자들

샐리너스 강가의 솔대드는 캘리포니아 주의 한 도시다. 풍광이 아름다운 이곳에 두 사내가 나타난다. 둘 다 청바지와 놋쇠단추가 달린 청재킷 차림이었고 볼품없는 검은 모자를 쓰고 단단하게 돌돌 만 담요를 어깨에 지고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 조지와 레니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행색은 당시 떠돌이 일꾼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들은 취업카드와 버스표를 쥐고 새로 일할 농장을 찾았다.

우리처럼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야. 가족도 없지. 어디에 속한 것도 아니지. 그냥 농장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이 좀 모이면 읍내에 가서 다 날려버려. 그리고 너도 잘 알다시피 또 다른 농장에 가서 죽자고 일을 해. 도대체 앞날이란 게 없지.

조지의 이 한마디 말이 당시 떠돌이 일꾼들의 삶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수없이 많은 일꾼들이 청재킷에 담요를 메고 농장과 농장을 떠돌며 날품팔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아무것도 꿈 꿀 수 없는 떠돌이 일꾼으로 내몬 것은 1929년 대공황의 한파다. <생쥐와 인간>이 발표된 1930년대는 고통과 불만의 시대, 즉 ‘Angry Thirties(성난 30년대)’였다. 경제 대공황의 격동이 미국을 강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제적인 빈곤에 허덕이던, 절망의 시대였다.

게다가 대공황 이전에 갑작스런 농업의 기계화로 수많은 소작인이 일터와 보금자리를 잃고 유랑하는 노동자로 전락해 대도시 주변을 맴돌거나, 뜨내기 농장 일꾼이 되어 이 농장 저 농장 떠돌고 있었다. 또한 숨가쁘게 진행된 산업 자본주의 발달은 급격한 문화 변동을 야기해 사회적 고통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일자리보다 실업자가 더 많았고, 실업자 수가 끝없이 늘어났기 때문에 임금은 계속 떨어졌고,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만들었다. 절대다수의 미국인들이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인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토지를 중심으로 이웃과 가족이 평화롭게 공동체를 일구며 살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은 채 세상 밖으로 내몰렸다.소설은 이 뜨내기 일꾼들이 얼마나 황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숙소라고 해봐야 침대 한 칸과 침대 머리맡에 놓인 사과상자가 고작이다. 매일 매일 거친 농장일의 대가로 몇 푼의 주급을 손에 쥐면 읍내 술집에서 술과 노름, 여자를 사는 일에 다 써버린다. 떠돌이 일꾼들이니 동료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어느 날 나타나 침대 한칸 차지하고 일하다 혼자 떠나버리는 부평초 같은 삶. 그러니 타인에게 신경을 쓰는 일 따위는 없다. 마음 붙일 곳도, 미래도 없이 떠돌다보니 심사가 꼬여 남을 믿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싸움질이다. 사람다운 삶은 찾아볼 수가 없다. 조지와 레니가 처음 농장에 왔을 때, 이 둘의 관계를 호의로 보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농장주 아들 컬리는 말할 것도 없고, 솜씨 좋고 우직한 마부 슬림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들을 이해하게 된다.

슬림의 눈은 조지를 꿰뚫어 그 너머를 보았다.

“함께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어. 어쩌면 이 빌어먹을 세상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서로를 무서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조지와 레니, 이 둘은 축복받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들처럼 떠돌이 일꾼이긴 했지만,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이들에게는 서로를 의지할 상대가 있었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있었다.

덫에 걸린 생쥐들-조지와 레니, 그리고 좌절된 꿈

<생쥐와 인간>은 소설로 출간되었지만, 스타인벡은 초기에 이 이야기를 연극으로 구상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6장으로 나누었고, 각각의 장은 하나의 장면을 담고 있다. 그래선지 소설로 출간된 뒤 곧바로 연극으로 만들어져 상연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모았다. (1940년에 영화로 개봉돼 좋은 평을 받았고, 1992년에 다시 영화로 제작되었다)이 ‘연극’의 주인공은 조지와 레니다.

‘조지 밀튼’은 작은 몸집에 검게 탄 얼굴이 영리해 보였고, 이목구비도 날카롭고 야무져 보이는 인물이다. 반면에 ‘레니 스몰’은 거대한 몸집에 얼굴 선이 분명치 않았고, 눈은 컸지만 눈동자는 흐릿했고, 어깨는 넓었는데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성장의 어느 단계에서 멈춘 듯 조금 모자란 인물이다.

1장의 배경은 샐리너스 강변. 조지와 레니는 일할 농장을 찾아가는 길이다. 두 인물은 등장하여 자신들의 미래, 소박한 꿈을 말한다. 2, 3장은 노동자들의 합숙소. 2장에서는 그들이 놓인 삶의 조건을 통해 왜 그들에게 꿈이 필요한지 보여주고, 3장에서는 늙은 일꾼 캔디의 합류로 두 사람의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한결 높아져 보인다. 4장에 이르면, 그 꿈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다. 모두들 읍내 술집으로 몰려간 시간, 내팽개쳐지듯 외로운 일꾼들이 남는다.

절대 고독 속에 웅크리고 있는 흑인 일꾼 크룩스와 자신의 늙은 개처럼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캔디와 모자란 어린 아이 레니. 이 외롭고 절망적인 사람들이 하나의 꿈으로 모아지는 것을 보면서 독자들의 염원도 커간다. ‘그래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어.’

하지만 꿈이 실현될 것 같은 기대감만큼 스멀스멀 밀려오던 불안감도 커간다. 어리숙하지만 괴력을 지닌 레니가 또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는데, 이름도 없이 컬리의 아내로 불리는 여자는 자꾸 그들의 주위를 맴돈다. 컬리와 컬리 아내, 레니… 독자들은 조지처럼 이들 셋이 분명 사고를 칠 게 틀림없다고 초조해한다. 그리고 결국 5장에 이르면 불안이 현실이 된다. 레니의 손에 컬리 아내가 목숨을 잃게 된다. 마지막 6장, 무대는 다시 샐리너스 강변. 그곳에서 레니는 죽음을 맞는다.

황폐한 삶으로 내몰린 떠돌이 일꾼들. 그들의 꿈은 스스로 농장을 소유하여 평안하게 정착하는 것이었다. 평생 남의 일을 하며 늙어버린 일꾼 캔디의 절규를 들어보자.

물론 다들 원하지! 모두가 조그만 땅덩어리를 원해. 큰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내 거라고 할 수 있는 땅 말이야.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고 아무도 쫓아내지 않을 곳 말이야. 난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어.
나는 염병, 이 주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씨를 뿌렸지만 곡식은 내 것이 아니었어.
추수할 때는 내 것이 아니었단 말일세. 하지만 이제는 내 것이 될 거야..

조지와 레니는 미래에 대한 꿈은 있었지만 어떻게 실현할지 모르는 아득한 것이었다. 늙은 일꾼 캔디가 두 사람의 꿈에 자신의 염원을 합치고 나서야 겨우 현실적인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고, 그들 역시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삶이었다. 쥐덫에 걸린 생쥐와 같은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조지는 왜 레니를 쏘아죽였을까?

레니는 감각적인 즐거움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다. 부드러운 것을 만짐으로써 큰 기쁨을 발견하는. 그는 아이처럼 순진하지만 스스로를 통제할 능력이 결핍돼 있으며, 방어적인 본능이 남달라 언제든 폭력적인 행동이 폭발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레니의 이 폭발력이 컬리의 아내를 죽게 만든다. 애초부터 조마조마했던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레니를 조지는 자기 손으로 쏘아 죽인다. 참으로 뜻밖의 결과다. 마지막 장면을 보자. 레니를 쏜 총을 버리고 돌아서는 조지에게 슬림이 말한다.

“자넨 그럴 수밖에 없었네, 조지. 정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하고 함께 가세.”

슬림은 조지를 이끌고 큰길로 통하는 오솔길에 들어섰다. 컬리와 칼슨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칼슨이 말했다.

“도대체 저 두 사람은 왜 저렇게 죽을상이야?”

소설을 덮고 한참을 생각해보게 된다. 조지와 레니는 과연 진실한 관계였나? 대체 조지가 레니를 쏘아 죽인 이유는 뭘까? 이 두 가지 면이 이 소설의 가장 특이한 부분이다. 조지와 레니, 둘은 어떤 관계였을까?

“참 나, 넌 정말 골칫덩이야. 너만 달고 다니지 않으면 나는 아주 편하고 멋지게 살 텐데…. 아주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여자도 하나 생겼을지 몰라.”

조지는 레니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레니 때문에 번번이 “끓는 물에 들어가 있는 꼴이라고.” 그런데 왜 조지는 자신의 발목을 옥죄는 레니를 떨쳐내지 않았던 것일까?
조지는 처음에는 레니를 무시했지만, 레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뜨내기 신세지만, 그와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게 좋기도 했다. 물론 조지의 심리를 더 파헤쳐 보면, 여러 가지 것들이 복합되어 있을 것이다. 조지는 레니를 자기 보호 아래 두면서 한껏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고, 레니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함으로써 일종의 권력의식 같은 것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니는 자신의 실패를 변명할 구실이 되어주었다. 조지와 레니의 관계가 참으로 복합적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레니에 대한 조지의 마음은 진심으로 보인다.

결국 레니가 큰 사고를 저지른다. 더불어 오랫동안 꾸어온 두 사람의 꿈은 좌절되고 만다. 강아지가 죽고, 컬리의 아내가 죽자 조지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샐리더스 강변으로 몸을 숨긴 레니. 조지는 그를 찾아내고 마침내 자기 손으로 레니를 쏘아죽인다. 왜 조지는 자기 손으로 레니를 죽였을까?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아 보인다.정말로 말썽만 부리는 존재 레니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또, 캔디의 늙은 개가 안락사를 당한 것처럼 가엾은 레니를 자기 손으로 죽여 그에게서 이 세상에서 사는 고통을 덜어주려고 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레니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치를 곤욕과 자신이 겪을 고초가 너무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이 모든 것이 뭉쳐서 하나의 동기가 된 걸까? 조지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레니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로 한 것이다. 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죽이고 싶어서. 어떤 의미로 보면, 사실 레니는 한낱 껍데기, 이미 죽은 인간이나 다름없는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조지는 레니를 자기 손으로 없앰으로써 자신 안에 있던 허망한 꿈과, 자기가 남과 다르다는 근거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평범한 다른 일꾼과 같은 인물로 돌아온 것이다.

레니의 죽음과 함께 조지는 꿈과 결별하게 된다. 그는 그 꿈을 계속 지니려고 애쓰지 않는다. 현실과 밀착한 생존의 길을 계속 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불굴의 생존의지의 승리를 다룬 이야기가 된다. 이 소설은 조지의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힘 앞에 굴복하는 인간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고통을 겪으면서 그 힘을 극복하는 과정, 자기 존중의 착각을 스스로 부수고 일어나 범속한 자기를 감수하는 과정을 그려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황치복, ‘존 스타인벡 소설과 영화적 변용 연구 :『생쥐와 인간』, 『분노의 포도』의 인물의 변모과정을 중심으로’)

조지와 레니의 슬픈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레니의 존재 속에 감추어두었던 자신의 본모습을 깨닫게 된 조지. 레니를 보내고, 꿈에서 깨어난 그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존 스타인벡(John E. Steinback 1902~1968)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샐리너스에서 태어났다. 스탠포드 대학을 다녔으나 학위는 받지 못했다. 소설 작품이 성공하기 전에는 작품을 쓰면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1935년 <또띠야 마을 이야기>로 처음 대중의 반응을 얻었고, 이어 <의심스러운 싸움>(1936), <생쥐와 인간>(1937)을 발표했다. 이어서 1939년에 발표한 <분노의 포도>는 참혹한 미국의 현실을 그린 대작으로, 이듬해 이 책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1952년에는 고향인 샐리너스 계곡과 자신의 가족사를 반영한 기념비적인 작품 <에덴의 동쪽>을 발표했고, 이 작품은 제임스 딘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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