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자

[ - 디베이팅데이 ]

이 사건은 단지 외모가 학살자와 닮았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진정한 야수성을 표현하는 것은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일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학살자> 중에서, 글 오수경 기자

허상과 진실 사이의 거리

우리는 수많은 예술 작품을 소비한다. 광고를 보는 것, 영화를 보는 것, 한편의 시를 읽는 것, 한 점의 그림을 보는 것, 늘 흐르는 수많은 영상들을 감상하는 것 등. 그리고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 곳곳에 소비자들의 구미에 꼭 맞는 장치들을 숱하게 만들어놓는다. 그러면 소비자들은 마치 덫에 걸리듯 그 장치에 취해 쉽게 카타르시스에 이른다. 대개 이 장치는 사실을 부풀려 만든 하나의 허상인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 <관상>에서 배우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이 큰 호평을 받았다. 과연 이정재가 열연한 ‘수양대군’은 진짜 ‘수양대군’에 얼마나 근접했을까? 과장된 표정, 목소리로 만들어낸 가짜 수양대군을 통해 사람들은 ‘수양대군’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허상이 만들어낸 앎은 오히려 진짜 수양대군을 아는 길을 방해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알게 된 ‘수양대군’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또 무엇일까? 브레히트의 <학살자>에서는 진짜 무라토프 총독이 가짜 무라토프 총독을 연기하려고 애쓴다. 이 간결한 에피소드를 통해 브레히트는 사실을 부풀려 만들어낸 허상이 얼마나 진실을 가리는지 예술 창작자들에게 묻는다. 사실 이 물음은 브레히트 당시보다도 상업적 영상들이 넘쳐나는 오늘날 더 절실한 울림을 선사한다.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

요즘에는 브레히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는 연출 분야에서 ‘낯설게 하기’ 혹은 ‘소격’ ‘거리두기’라는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예술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학살자>는 브레히트가 남긴 몇 안 되는 소설 가운데 하나다. <학살자>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어느 노인이 ‘흰 독수리’라는 제목의 영화를 촬영하는 영화 제작소로 찾아왔다. ‘흰 독수리’는 잔인한 학살자 무라토프 총독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먹을 것과 잠자리가 필요했던 노인은 자신이 무라토프와 외모가 매우 닮아서 무라토프 역할을 맡고 그 대가로 빵과 숙소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감독은 물론이고 무라토프 역을 맡았던 배우 또한 노인이 실제 무라토프와 흡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노인에게 무라토프 연기를 하도록 한다. 그러나 결국 무라토프 역은 원래 그 역을 맡았던 배우에게로 돌아갔다. 노인은 사과 두 개와 하룻밤을 묵을 수 있는 돈 몇 푼을 받고 빈민 숙소로 향했다. 무라토프와 매우 닮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고용된 무라토프 총독의 관할권에 살았던 생존 피해자들이 그 행동도 실제 무라토프와 꼭 닮았다고 하는, 이 사람은 왜 무라토프 역을 맡는데 실패한 것일까?

노인은 “아주 건성건성 무심한 듯” 연기를 했는데 유대인들이 보기에 그런 행동 자체가 무라토프와 꼭 닮았다. 사과 먹는 연기를 하는 노인의 모습은 더 그랬다. 노인은 “전혀 탐욕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습관적으로 하던 일처럼 익숙하게 먹었다.” 하지만 감독이 보기에 노인의 연기는 전혀 무라토프와 닮아 보이지 않았다. 감독은 노인에게 “학살자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소설 전체를 읽은 독자라면 노인이 실제 무라토프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설의 노인이 실제 무라토프였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브레히트가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학살자>를 썼고 그 사건에서는 노인이 무라토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설 속 노인도 무라토프일 확률이 높은 것 같다. 감독은 노인에게 학살자 연기를 지도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연기입니다. 전형적인 악한이라고요. 이것 보세요, 아저씨. 그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학살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건 전혀 무라토프가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전형적인 악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학살자’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전형(典刑) 이란 기준이 되는 어떤 형을 말하며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본보기를 뜻한다. ‘일반적’이라는 말과 바꿔 써도 무리 없을 듯하다. ‘일반’은 전체에 두루 해당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전형적이라든가 일반적이라는 말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어떤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물론 감독이 생각한 ‘전형적인 악한’이라는 것 자체가 감독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노인과 유대인들 외에는 모두가 감독의 생각에 동의했다. 아마도 현실의 독자들 역시 그럴 것 같다. ‘학살자’라고 하면 잔인함과 포악함 등이 먼저 떠오르지 않는가? 어찌됐든 노인의 연기는 감독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진실 혹은 사실로 여겨지는 데 실패한다.

전형 혹은 선입견의 어리석음

<학살자>는 때로 선입견 때문에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 등을 잘못 인식하게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동시에 영화와 같은 예술 작품이 올바른 인식을 가로막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학살자>의 제작진은 학살자의 이미지를 과장되게 표현하려 한다. 제작진은 노인에게 더욱 잔혹하고 탐욕스럽고 야수 같아 보이는 연기를 요구했다. 유대인 조연들이 실제 무라토프는 회담하는 동안 사과를 전혀 먹지 않았다고 했는데도 사과 먹기를 주문했다. 사과는 영화가 학살자의 이미지를 과장되거나 극적이게 포장하여 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고 노인과 달리 주연 배우 코칼로프는 과장된 학살자의 모습을 열연함으로써 학살자를 영화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우리는 학살자를 포악하고 잔인하며 야수 같은 이미지로 떠올린다. 정말 그럴까? 소설에 나오는 학살자 무라토프 총독은 2차대전 발발 전에 수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를 직접 본 적이 있는 유대인들은 그에게서 관료의 모습을 봤을 뿐이다.

“그들이(유대인들이) 실제로 무라토프를 대면했을 당시 그가 보여준 습관적이고 관료적인 행동은 그들에게 끔찍스러운 인상을 남겼다.”

물론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일을 관료적 혹은 사무적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무라토프의 잔혹한 학살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조금 달리 보면 무라토프가 그런 학살을 저지른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 관료로서 행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 볼 수도 있다. 무라토프의 행동이 옳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정말 전형적인 학살자였는지, 전형은 언제나 전형일 수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혹은 거리두

1919년부터 독일에서는 한동안 표현주의 영화가 큰 인기를 모았다. 표현주의란 20세기에 전개된 예술 운동으로, 작가 개인의 주관적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표현주의는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 예술과 문학, 연극, 영화, 음악에까지 퍼져나갔다. 그중 표현주의 영화는 인간 내면을 영상으로 표현하려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표현주의 영화는 상상을 통해 허구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표현주의 영화의 성향은 자극적인 것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상업주의적 예술과 잘 맞아떨어졌다.

브레히트가 <학살자>를 쓴 것은 1928년. 관련 학자들은 이 작품이 표현주의 영화, 특히 상업영화를 비판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브레히트는 관객들이 연극의 내용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거리를 두면서 객관적이며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브레히트가 생각해낸 서사기법이 ‘소외효과(DerVerfremdungseffect)’다. ‘낯설게 하기’ ‘거리두기’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연극 속 사건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살펴보며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여러 장치를 활용해 관객이 연극 내용에 몰입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관객들이 영화와 연극 등 예술 작품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떤 깨달음보다는 즐거움이나 재미, 감동인 경우가 많다. 자신을 작품 속 인물과 일치시키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길 원한다. 예술은 이미지의 구상이다. 당연히 현실의 사물이나 현상 그 자체일 수는 없다. 또한 예술이 만들어낸 허상이 의미 없는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의심 없이 허상을 쫓다보면 진실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브레히트가 말하는 ‘거리두기’가 의미 있는 것은 그래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

독일 작가. 시, 희곡, 산문,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썼다. 하지만 희곡 작품을 가장 많이 썼고 스스로도 ‘극작가’로 불리길 좋아해 극작가로 더 유명하다. 바이에른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났고 뮌헨대학 의학부에 다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위생병으로 소집되어 육군병원에서 근무했다. 그 뒤로 반전적, 비사회적 경향을 보이면서 제대군인의 혁명 체험의 좌절을 묘사한 <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상을 받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덴마크로 망명하여 반파시즘 활동을 하면서 여러 희곡과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살아남은 자의 슬픔> 등의 많은 시를 발표했다. 이어서 핀란드, 미국 등으로 15년여 간의 망명생활을 하면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의 희곡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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