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 - 디베이팅데이 ]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쥐가 들끓는,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도시에서 광대 노릇을 하며 살아가던 ‘아서’.
삶이 천천히 그의 위로 무너져 내리자, 그는 그 아래 깔려 죽는 대신에 다른 선택을 한다.
아서가 점점 새로운 자아에 굴복하면서 그의 삶뿐 아니라 온 도시가 혼란의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글 유인서 기자/사진 네이버 영화

기대보다 덜 미쳤고, 덜 재밌고, 덜 무서웠다

올해 신기하게 보고 싶은 영화가 잔뜩 개봉했다. 대낮에 벌어지는 신기한 종교체험 공포영화 <미드소마>를 시작으로, 비틀즈 영화 <예스터데이>, 쿠엔틴 타란티노의 신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까지. 그리고 어느 날 유튜브에서 우연히 영화 <조커>의 티저를 보았다. 엄청 잘 만든 티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2분여 정도 되는 영상 안에 담긴 묘한 광기에 매료되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영화 분위기와 조커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짙은 인상을 남겼다. 기대가 차올라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예전부터 나는 광대에 관심이 많았다. ‘남을 웃기는 광대가 알고 보면 제일 슬픈 사람이었다’라는 광대 비극처럼 아이러니가 담긴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조커>는 너무나 내 취향의 작품처럼 보였다. 거기다 “<다크 나이트>에 비견될 만한 작품이다!” “희대의 명작이 탄생했다!” 등의 평가가 마구 쏟아져서 더욱 흥미를 돋우었다.

영화 개봉 후, 흥미롭게도 관람객들의 평이 완전 극과 극으로 갈렸다. 누군가는 너무 재밌었다며 찬사를 날리는 한편, 범죄자를 옹호하는, 불쾌하고 건강하지 않은 영화라고 말하는 이들도 보였다. 부정적인 리뷰들을 읽으면서도 나는 왠지 이 영화를 좋아할 것 같다는 확신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부푼 마음을 안고 친구와 함께 극장에 갔다.

명품 티저, 하지만 티저에 갇힌 본편

<조커>의 내용은 한 줄로 간단히 풀어서 쓸 수 있다. ‘사회에서 도태된 한 인간이 흑화하는 과정.’ 파티 광대로 일하는 ‘아서’는 고담시의 슬럼에서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그에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장애가 있다. 고담 시에서 제공하는 약과 정신과 상담으로 우울증과 싸우며 살아가지만, 시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상담 세션과 정신과 약 공급마저 끊긴다. 가난한 그에겐 약을 사고 병원에 다닐 돈이 없다. 사회성이 부족하고 어딘가 괴상해 보이는 그를 고담 시의 건달들은 괴롭힌다. 아서는 이유 없이 타인에게 얻어맞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지만, 아무도 그의 억울함에 대해 알아주지 않는다. 결국 아서는 지하철에서 소름끼치게 웃는다는 이유로 그를 폭행하던 남자 셋을 총으로 살해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불행한 삶과 출생의 비밀에 대해 파헤치다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고, 점점 자기 자신을 찾아나간다.

사실 여기까지는 티저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위에 설명한, 티저와 똑같은 이야기가 무려 영화의 반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아서의 삶이 얼마나 기구하고 불행한지를 반복, 반복, 또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었다. 티저를 가래떡처럼 늘려놓은 것 같은 전개에 나는 금세 지루해졌고, 상영 도중 영화관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꾹 참고 끝까지 봤지만 영화 후반부에 가서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이야기가 너무 뻔하다고 느꼈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만한 깊이도 없고, 유치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보고 나서 ‘이럴 줄 알았으면 쿠엔틴 타란티노 새 영화나 보러 갈 걸’하고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영화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모든 감상이 존중받기를

<조커> 개봉 직후부터 영화가 지나치게 살인마의 의식의 흐름을 조명해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범죄자가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마저 범죄자를 낳은 사회가 대신 지게 만든다’라는 비판이었다. ‘영화의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 안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관한 논란은 거의 모든 영화에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독 그 논쟁에 불이 더 붙었다. 영화를 재미없게 본 것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영화에 어떤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는 종류의 이야기엔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홀로코스트 같은 끔찍한 일들)을 왜곡하거나 실존 인물을 모욕해 명예훼손을 한 작품이 아니라면, 영화는 어떤 내용을 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어쨌든 삶에 관한 것이고, 삶은 항상 제멋대로니까.

하지만 내가 그저 위와 같은 사고에 동의하지 않을 뿐, 영화의 사회적 역할을 고려하는 비판은 모두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정치적 올바름을 지나치게 갈망하는 태도는 영화를 온전히 감상하지 못하도록 망치는 행위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영화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무언가를 감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창작 행위라고 생각한다. 예술에 대한 감상은 오롯이 감상자의 개인적 경험과 성향에 달린다. 감상자와 별개인 ‘온전한 감상’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

누군가에게 영화는 삶과 동떨어진 환상 세계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영화는 프로파간다 일 수도 있는 것이다. 위의 사람이 이야기한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사람’의 태도, 즉 영화에 등장하는 반反인권적 기표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역시 그저 하나의 감상일 뿐이다. 그에겐 그러한 태도가 “지나치게 올바름을 추구하다가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한다!”처럼 보였던 것 같지만, 애초에 영화를 영화로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영화’란 매체의 개념이 다 다르니까. 모든 사람이 동등한 것처럼, 모든 감상이 동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는 예술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적어도 남이 보기에 불쾌한 것을 만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뭐가 어찌됐든 상관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발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예술은 대중의 감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런 대화를 통해 사회 속에 어떤 ‘공동의 감정선’의 윤곽이 형성되면 그것이 또 창작자에게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거대한 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영화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따위의 말을 하는 나에게 아주 생각도 책임감도 없는 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 그것도 하나의 의견인 것이다.

<택시 드라이버>와 <조커>, 그리고 트래비스와 아서

이 영화를 보면서 마틴 스콜세지의 1976년 작 <택시 드라이버>생각이 많이 났다. 미국 영화의 고전 중 하나로 꼽히는 <택시 드라이버>는 베트남 참전 이후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윤락과 퇴폐로 가득한 뉴욕의 밤을 배회하는 택시 운전사 ‘트래비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역시 사회에서 도태된 <조커>의 주인공 아서와 닮았다. 이렇듯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두 영화를 본 나의 감상은 참 달랐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나름대로 몇 가지 차이점을 찾아냈다.

우선 택시 드라이버가 훨씬 담백하다. 조커를 보면서 좀 부담스러웠던 건 영화가 시종일관 주인공의 비극을 과장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아서가 지하철에서 자신을 습격한 남자 세 명을 총으로 쏜 뒤, 공중화장실에 숨어 춤을 추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는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우상화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두 주인공이 세상과 부딪히면서 생긴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도 차이가 났다. 아서의 살인은 전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나중에 아서가 살해한 세 명의 남자가 금융계에서 일하는 부유한 청년들로 알려지면서, 빈부격차가 극심했던 고담 시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조커는 폭동의 상징 취급을 받지만, 이건 아서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트래비스의 경우, 그의 관심사는 포주에게 잡혀서 시종일관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매춘을 하는 미성년자 여성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아서가 개인적인 복수의 차원에서 그냥 싫어하는 사람들을 죽여댄 느낌이라면, 트래비스에게는 어쨌든 자신의 마음속에 정립한 정의로운 모습이 있었고 그는 신념을 추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커는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유층을 대표하는 고담시의 사업가 ‘토마스 웨인배트맨의 아버지’은 가난한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아주 단편적인 기업가·정치인으로 그려진다. 반면 택시 드라이버엔 단순히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 인물을 쉽게 규정하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이 조커와 달랐다.

<조커>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덜 미쳤고, 덜 재밌고, 덜 무서웠다. 무엇보다 영화가 오버스러웠고 캐릭터들도 단편적이었다.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정도로 화제였던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멋졌지만, 볼 게 그것밖에 없었던 탓에 금방 색이 바랬다. 이런 대본을 가지고 그 정도의 연기 포스를 뿜어낸 게 오히려 더 대단한 건가 싶기도 하다. 호아킨 피닉스란 배우가 궁금해졌고, 그가 다음에 찍을 영화가 기대되기 시작했다는 게 이 영화에서 건져 올린 유일한 수확이었다.

*가스라이팅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의 판단력을 의심하여 상대방에게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


깊이 보고, 다르게 보고, 제대로 보고” 생각을 키우는 첫걸음, <유레카>가 함께 합니다. 논쟁, 독서, 시사, 인문교양, 입시… 청소년에게 필요한 정보를 <유레카>로 만나보세요. <유레카>는 한 달에 한 번 발행되는 청소년 인문교양 매거진입니다.

  Opinions

  1. 그루트의 프로필
    Lv2 그루트 님의 의견 - 2주 전

    전 글에서 말끔하신 단점들이 오리려 장점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춤을 추는 순간 아서는 외부에 맞춰 약을 먹고 가면을 쓰고 보여주는 모습이 아닌 자기 내부에서 들리던 음율에 따랐죠. 처음으로 어머니나 사회적 시선 등이 아닌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 시점이라 보입니다. 또란 다른인물의 단편적인 모습에서 관객은 전지적 시점에서 아서를 평가하지 않고 스스로 아서가 되어 1인칭으로 볼 수 있게 되었죠. 만약 주변인들을 입체적으로 다뤘다면 관객들은 아서를 사람 그자체의 프레임으로 그의 행동을 평가했겠죠. 하지만 철저히 아서가 보는 모습에서 주변을 다루었기에 상황프레임으로 아서의 행동을 보게되어 그저 한 개인의 특이성이 아닌 누구든 저러한 상황에선 조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티져에 나온 장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아서의 심리를 더욱 부각 시킴으로 관객이 전지적 시점이 아닌 1인칭의 아서로서 상황을 볼 수 있도록 만든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타인에게 수치심을 주어 열등하게 만드는 사회가 그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만 돌리고 있음을 보여주는것 같았습니다. 또한 열등감을 품고 수치심이 당연해진 현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스스로가 아닌 사회적인 기대를 만족 시키기 위해 사는지도 보여주는 듯 했고요. 또한 조커가 될 사람이었기에 조커가 된것이 아닌 사회가 만들어 가는 조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던 영화였습니다.

    0 0 답글
  • 토론의 순수성을 신뢰합니다.
  • 서로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 소통과 공감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 지식과 지혜의 조건없는 공유를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