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호르몬

[ - 디베이팅데이 ]

마술사 같은 호르몬이 벌이는 놀라운 일들

호르몬이 정확히 무슨 작용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호르몬이 무얼 하나 들여다보면, 그 대단한 능력에 깜짝 놀라게 된다.우리 몸에서 펼쳐지는 호르몬의 마술을 살펴보자. 글_박지니 기자

화학 전령, 호르몬의 늦은 발견

일상생활을 하면서 남성호르몬이 많니 적니, 호르몬 탓이라니 하는 말들을 심심찮게 한다. 하지만 호르몬의 존재가 발견되고, 호르몬이라 명명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나는 이 ‘화학 전령’을 호르몬이라고 부를 것이다. 호르몬이란 ‘흥분시키다’ 또는 ‘자극하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호르마오’에서 유래한다.”

1905년, 내분비학자 스탈링은 런던왕립학회 강연에서 인체 내분비샘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에 대해 설명하면서 세계 최초로 ‘호르몬’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호르몬을 다루는 내분비학은 19세기에 와서야 연구가 시작됐다. 해부학을 통해 17세기 말 그럴듯한 인체해부도를 만들어낸 것과 비교하면 꽤 늦은 일이다. 호르몬이 장기(臟器)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이라 늦게 발견됐기 때문이다.

인체의 장기나 신경계는 해부를 하면 눈으로 판별이 되기 때문에 생명 유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위는 식도와 연결돼 있으며 소화 작용을 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호르몬의 경우는 다르다. 호르몬은 갑상샘 같은 내분비샘에서 분비되어, 혈액을 타고 호르몬 반응이 일어나는 곳으로 도달해 작용한다. 이전에는 우리 피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니 호르몬의 존재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던 것.

호르몬의 존재는 다소 엽기적인 실험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1848년 독일 의사 아놀트 베르톨트는 고환의 역할을 알아내고자 했다. 수탉 두 마리의 고환을 각각 떼어내 한 마리는 거세된 채 두고, 다른 한 마리의 경우 배에 고환을 이식했다. 그 결과, 거세된 수탉은 뚱뚱해졌으며 빨간 벼슬이 퇴색되고 암탉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배에 고환이 달린 수탉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이 실험을 계기로 장기나 신경계의 위치와 상관없이, 우리 생각과 몸을 변화시키는 어떠한 물질이 있다는 생각이 의학계에 자리 잡았다.
앞서 밝힌 스탈링의 강연 이후 호르몬 의학은 점차 발전을 거듭했다. 1920년대엔 인슐린이 발견돼 당뇨병 치료제로 사용되었고, 1970년대에는 신생아 갑상샘호르몬 기능 검사가 개발되었다. 갑상샘호르몬이 부족하면 지적 장애가 온다. 이 검사를 통해 갑상샘호르몬이 부족한 아이들이 제때 호르몬을 보충 받아 지적 장애를 피해갈 수 있었다.


** 인체에는 9개의 핵심 분비샘이 존재한다. 뇌에는 시상하부, 솔방울샘, 뇌하수체가 있고, 목구멍에는 갑상샘과 부갑상샘, 췌장에는 랑게르한스섬이 있다. 신장 위에는 부신, 생식기에는 난소 및 고환이 있다.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호르몬

호르몬은 정말로 신기한 존재다. 분비되는 순간, 혈관을 타고 필요한 곳으로 가서 뿅 하고 작용을 시작한다니. 어떻게 필요한 부위에 찾아가서 필요한 호르몬을 쭉쭉 내뿜는 걸까? 정말로 마술을 부리는 걸까? 이럴 수 있는 이유는, 모든 호르몬에는 이름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가방에 붙여진 이름표를 보고 소율이에게는 소율이 가방, 민준이에게는 민준이 가방을 들려주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이 성호르몬이 부족하다고 인식하는 상황이라 가정하자. 뇌하수체 전엽은 방출호르몬을 분비한다. 이 호르몬은 전령 역할을 한다. 방출호르몬은 우리 몸이 원하는 성호르몬의 이름표를 받아들곤, 혈관을 따라 성호르몬을 분비하는 난소와 고환을 향해 총총 이동한다. 그리고 분비샘에 도착하면,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의 이름표를 꺼내든다. 그럼 난소와 고환이 이름표를 보고는 성호르몬을 분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토록 흥미로운 호르몬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은지? 호르몬이 우리 몸에서 하는 일은 너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재밌는 호르몬 작용을 뽑아 소개해 볼까 한다. 지금부터 호르몬이 하는 일을 살펴보자!

01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살이 찐다면?

‘호르몬 이상’이라는 단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호르몬 결핍 때문에 심각한 병세에 시달리는 모습이 아른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르몬 이상 증세는 일상적인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질환으로는 비만이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의사들은 연구를 통해 호르몬이 비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았는데도 지나치게 살이 찐다면, 체중을 조절하는 갑상샘호르몬과 성장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겼을 수 있다. 만일 포만감을 느끼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희귀한 내분비장애인 ‘진구아편양흑색소부신피질자극호르몬결핍증’ 환자라면, 언제나 배고픔을 느끼게 되어 음식을 과다 섭취하게 된다. 현재 호르몬 관련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결핍된 호르몬을 주입받거나 혹은 과다 분비되는 호르몬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02 호르몬이 성별도 결정한다고?

1920년대, 내분비학자인 슈타이나흐 박사는 암컷과 자주 접촉한 수컷 쥐의 정낭과 전립샘이 암컷과 격리된 수컷 쥐보다 비대함을 발견했다. 그는 난소나 고환이 스위치처럼 작용해 흔히 말하는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을 활성화시킨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어릴 때는 남자아기와 여자아기를 외모로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사춘기에 돌입하면, 스위치(난소 및 고환)가 켜져서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특징이 겉모습으로 드러난다.슈타이나흐 박사는 연구를 계속하며 궁금증이 생겼다. 사춘기 이전에 동물 수컷을 거세한 후 난소를 이식하면, 사춘기 이후에 완전한 수컷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암컷으로 변모할까?

그는 기니피그를 가지고 생식샘 실험에 돌입했다. 그 결과 난소를 이식받은 기니피그 수컷에게선 여성성이 두드러졌고, 고환을 이식받은 기니피그 암컷에게선 남성성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로 인해 슈타이나흐 박사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결정짓는 건 뇌가 아니라 생식샘이라고 결론지었다. 인간의 생식샘에서는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 모두 분비되고, 생물학적 성별과 관계없이 특정 성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는 “이 세상에 100퍼센트 순수한 남성이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슈타이나흐 박사는 성별이 확정되지 않은 태아 시기의 아기는 남녀 어느 쪽으로도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그 이후 정해지는 성별은 어떤 호르몬이 더 우세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는 과학자들이 성별 결정 단계에서 호르몬 작용을 잘만 조절한다면, 태아의 성별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성별은 정신적인 성별이 아니라, 신체적인 성별을 의미한다. 그 이후 호르몬은 한동안 신체적인 성에만 관련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호르몬이 정신적인 성젠더(gender)에도 영향을 준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03 신체 성별뿐이 아냐, 젠더도 결정하는 호르몬!

1959년, 내분비학자들은 호르몬이 신체의 성별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래서 학자들은 암컷 쥐에게 테스토스테론을 주입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주입 이후 신체의 성별은 암컷인 쥐가 정신적으로는 수컷인 것처럼 행동한다면, 호르몬이 생명체의 정신적인 성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험 결과, 테스토스테론을 주입받은 암컷 쥐는 전보다 공격적인 성향을 띠긴 했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암컷 쥐의 행동양식을 보였다. 내분비학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암컷 쥐 태아에게 테스토스테론을 주입했다. 그러자 상황이 달라졌다.태아 시절 테스토스테론을 주입받은 암컷 쥐의 신체적인 성별은 여성이었지만, 그는 수컷 쥐처럼 행동했다. 다른 암컷 쥐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구애했고, 심지어 다른 암컷 쥐의 등에 올라타 교미를 시도하기도 했다. 나중에 에스트로겐을 추가로 주입받았지만 그 쥐는 여전히 수컷처럼 행동했다.
이 실험을 통해 태아가 뱃속에 있을 때, 어떤 성호르몬에 더 많이 노출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정신적인 성별이 달라진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현재 내분비학자들은 호르몬이 정신적인 성별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내려 연구를 거듭하는 중이다.

04 호르몬이 킬러 본능을 일깨워 범죄자를 만든다고?

호르몬은 사람의 정신과 신체를 관장하는 마술사다. 그래서 종종 호르몬의 ‘마술적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오해가 생기는 일이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킬러 호르몬이 있다. 호르몬이 킬러 본능을 이끌어 내 범죄자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구체화한 사람은 1920년대 미국에서 활동한 루이스 버먼 박사다. 그는 호르몬 요법에 열광하는 사람이었다. 버먼 박사는 ‘혈액형별 성격 진단’과 비슷한 ‘호르몬별 성격 진단’을 만들어냈다. 그에 따르면 뇌하수체 분비샘이 발달한 사람은 리더십이 강했다. 그는 뇌하수체 발달형 인간으로 나폴레옹과 링컨을 예로 들었다. 지도력과 따뜻한 마음을 동시에 지닌 간호사 나이팅게일은 전립샘-뇌하수체 혼합형이었다.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흉선형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혈액형별 성격 진단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과학적 근거가 없는 끼워 맞추기라, 버먼의 호르몬 성격 진단은 동료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급기야 버먼 박사는 호르몬을 통해 개인의 폭력성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28년부터 뉴욕의 소년교도소에서 소년범 250명을 대상으로 3년 간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혈액을 체취하고, 다양한 신체 부위의 엑스선 사진을 촬영했다. 그런 다음 그 결과를 건강한 일반 시민 대조군과 비교한 후 “범죄자들은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보다 내분비장애가 세 배 이상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버먼의 연구 과정은 탄탄한 체계를 갖추지 못해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범죄예방의학의 근거 자료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먼의 논지는 범죄자와 그의 변호인 측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호르몬 때문에 범죄가 일어났다면, 범죄의 책임을 오롯이 범죄자에게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범죄자 역시 호르몬에 의해 원치 않는 불법 행위를 저질러 피해자가 된 셈이니 말이다. 그러나 법에서는 킬러 호르몬을 인정하지 않았다. 설령 호르몬과 범죄의 상관관계가 명확하다고 해도, 범죄를 저지른 이상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주된 판결 요지였다. 그리하여 ‘킬러 호르몬’ 주장은 오늘날 힘을 잃고 거의 사라졌다.


비만, 신체적인 성별, 정신적인 성별, 범죄 본능까지… 호르몬은 다양한 분야에 관여한다. 게다가 성장, 수면, 스트레스나 면역 작용을 비롯한 수많은 인체 활동에 영향을 끼치니 실로 마술사나 다름없다. 그러니 호르몬을 알아가는 과정은 우리가 얼마나 마술 같은 작용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 깨닫는 길이다.

호르몬에 대한 재밌는 사실들

1. 그동안 과학계는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을 전혀 다른 물질로 분류했는데, 최근엔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이 히드록실기(hydroxyl, -OH )하나만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대! 두 호르몬은 옷만 다르게 입은 쌍둥이인 셈이네.

2.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은 성호르몬일 뿐만 아니라 성장호르몬이기도 하다고! 난소, 고환, 질, 음경의 발달 외에도 간, 근육, 뼈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대.

3. 우리는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으면 반대로 에스트로겐의 수치는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은 사람은 에스트로겐 수치 역시 낮다고! 이로써 두 호르몬이 반작용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거지.

4. 놀랍게도, 사람은 뇌하수체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대! 하지만 뇌하수체가 없는 사람은 성장하지 못한다고. 또한 피곤을 쉽게 느끼며,칼로리를 제대로 연소하지 못하는 문제를 겪는다고 해. 그래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뇌하수체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호르몬 치료를 통해 부족한 호르몬을 보충해야 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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