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한 빛

[ - 디베이팅데이 ]

사진의 위험성을 알리는 포스트모더니즘 비평

한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책장 뒤편에 숨겨진 책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책은 홀로코스트 수용자들의 참상을 기록한 《폴란드 유대인 블랙북》으로, 아이는 책 속 사진을 보고 놀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는 비쩍 말라 유령 같아 보이는 책 속 희생자들이 자기와 같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다. 내가 아는 유대인은 전부 뺨에 분홍빛 생기가 돌고 자신만만하며 당당한데…. 아이는 묘한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낀다. 이 일화는 저자인 수지 린필드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자는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어 사진 비평을 공부했다.

현대 사진 비평은 포스트모더니즘(1960~)의 굳건한 영향 아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인 수잔 손택(미국의 예술평론가, 극작가, 사회운동가. 1933~2004)은 1977년 《사진에 관하여》를 출간했다. 오늘날 사진비평의 기초가 되는 기념비적인 책이다. 손택은 이 책에서 사진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사진은 파국의 장면을 보여주지만 그 원인이나 역사는 한마디도 설명하지 못하므로 사진이 과연 정치적, 윤리적으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했다. 애비게일 솔로몬고도(미국의 사진비평가. 1948~)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희생자를 나약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관념을 재생산하고 자극적인 이미지로 피사체를 억압하는 ‘이중의 정복행위’를 저지른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들은 분명 유의미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어린 시절 《폴란드 유대인 블랙북》을 보고 느꼈던 기묘한 감정이 단지 사진이 가진 위험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에 담긴 세계의 어두운 단면을 봐야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진이 어두움을 밝히는 수단이 될 가능성은 없을까? 사진은 어떤 사람의 일생과 고통을 마주하고 그에 연대할 수 있는 힘을 품는다. 저자는 이러한 사진의 가치를 밝히기 위해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비판을 짚어보고 유의미한 지적을 인정하는 한편, 부당한 지적을 반박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의의를 말한다

*참고* 포스트모더니즘 사진 비평과 모더니즘
모더니즘1920~은 이성주의를 대표한다. 흑백이 분명하고 합리적인 것을 중시하는 모더니즘 사조는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상과 맞물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백인 사회’가 ‘미개하고 비합리적인 제 3세계’를 지배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발전했다. 이러한 모더니즘에 반기를 든 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분법적인 구분과 제국주의, 권력층의 오만을 경멸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진 비평은 사회 권력 지배층이 사회적 약자가 받는 고통을 피상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기만이라고 여겼다. 고통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희생자의 삶을 단편적인 프레임 안에 가둔다는 건 말도 안 될 뿐더러, 그렇게 단편화된 삶이 곡해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사진,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진 못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예술 비평을 휘어잡은 아래,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비판적인 지적이 이어졌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가나 관람자의 입맛에 맞춰 피사체의 모습을 함부로 담아낼 수 있으며,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의 삶에 관심을 보인다는 생색을 내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고. 이에 대해 저자는 사진이 가진 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이 부당한 점도 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진가의 역할과 관람자의 가능성을 틀에 가둔다. 사진가는 비극적인 현실을 비틀어서 포착하고, 감상자는 아무런 의심 없이 현실과 다르게 변형된 이미지를 흡수한다고. 그러나 정말 사진가가 현실에 기반한 통찰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까? 감상자는 사진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러한 반박을 위해 발터 벤야민(독일의 평론가. 1892~1940)의 말을 인용한다. 벤야민은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카메라의 단순한 시선이 주관적이고 복잡한 인간사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까 염려했다. 그러나 그는 사진이 가진 주체적 힘을 이해했다. 사진을 보는 관람자가 생동감을 느끼고 사진이 묘사하는 세계로 들어가 때로는 그 세계를 바꾸고 싶게까지 만드는 힘 말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공감과 연대를 통해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담는다.

또한 사진은 민주주의 이념과 잘 부합하는 매체다. 카메라 발명 이전에는 권력층만이 회화로 자신들의 모습과 역사를 기록했다. 회화란 상당한 자본이 필요한 고급 문화였으므로 사회적 약자의 삶은 그림으로 남길 수 없었다. 그러나 사진은 대중이 접하기 쉬운 매체다. 카메라 셔터만 누른다면 누구든 기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카메라로 모든 계층이 자신의 삶과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건 누구나 프레임 안에서 현실을 조작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 사진 비판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사진 속에 현실을 담을 수 있다는 얘기는,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당하는 탄압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이 부당한 폭력을 고발한다. 5·18 민주화운동 역시 외신기자의 사진 덕분에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진 담론이 사진의 힘을 지나치게 폄훼한다고 주장한다.

다큐멘터리와 포르노그래피

사진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은, 소위 ‘제3세계’의 폭력과 빈곤을 찍은 사진이 오만하고,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라는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을 강자의 시선에서 수동적이고 불쌍한 존재로 담았다는 지적이다. 이 관점을 기반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포르노그래피’와 같다고 보는 시각이 등장했다. 덴마크의 인권운동가 요르겐 리스너는 아프리카 기아희생자를 찍은 사진에 대해 “인간 삶에서 섹슈얼리티만큼이나 미묘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 즉 고통을 노출했기에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회 포르노그래피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수잔 손택은 “매혹적인 신체가 침해당하는 장면을 전시하는 모든 이미지는 어느 정도 포르노그래피적이다.”라고 말했다.


<사진1> 독수리와 어린 소녀, 1993, 케빈 카터_ 수단 내전으로 인한 비극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포르노그래피같다는 지적을 받았다.

다큐멘터리와 포르노그래피 담론에서 가장 화제가 된 사건은 ‘독수리와 어린 소녀’를 둘러싼 일들이다. 1993년 사진기자 케빈 카터는 수단에서 쉬려고 땅바닥에 엎드린 굶주린 아이를 독수리가 먹잇감으로 노리는 모습을 포착해 사진에 담았다. 사진이 공개되자 케빈 카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죽어가는 아이를 구하지 않고 극적인 사진을 찍는 데 집중했다는 비판이었다. 자극적인 사진 구도가 포르노그래피 같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케빈 카터는 수단 내전의 비극을 알리려고 사진을 찍었으며, 촬영 후 아이에게 바로 음식과 물을 준 뒤 보호시설로 옮겼다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 년 뒤인 1994년 ‘독수리와 어린 소녀’는 수단 내전의 참혹함을 세계에 알린 공로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지만, 같은 해 케빈 카터는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이런 비난은 타인의 고통을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것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된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수리가 기아를 노리는 현실을 생생하게 알린 이 사진을 포르노그래피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고통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구성한 게 아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잔혹한 현실을 포착한 것일 뿐이다. 적나라한 현실을 담아서 보기 힘들지라도 꼭 봐야 하는 사진이 있다. 저자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두고 포르노그래피화 된다고 걱정하는 태도에는 잔인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 전 지구적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다고 설명한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그러나 너무 자극적이지는 않을 정도로 이미지를 담아낼 것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현실이 우리의 상상보다 참혹할 때 모두가 관람하기 쉽게 이미지를 조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케빈 카터의 ‘독수리와 어린 소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너무 충격적이니 삭제해야 마땅했을까? 인간에게 닥친 비극을 누구도 거슬림 없이 볼 수 있게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고통을 묘사하는 사진은 필연적으로 보기 힘들다. 누군가의 죽음을 아무런 동요 없이 묘사할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을 감상하기 편안하도록 기록할 수 있을까?

저자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포르노그래피라고 부를 때 생기는 오류를 하나 더 지적한다. 포르노그래피는 타인이 보아서는 안 되는 개인의 성생활을 전시함으로써 관음증을 자극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고통 받는 이들을 포착하는 상황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희생자들의 고통이 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진 속 사람들의 고통은 대부분 전쟁과 같은 공적인 사건에서 비롯된다. 세계 어딘가에 고통 받는 이들이 있다고 알리는 행위를 사적 영역을 엿보는 포르노그래피에 빗대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우리는 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


<사진2> 네이팜탄. 1972. 닉 우트_네이팜탄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불타고, 한 소녀가 입고 있던 옷에도 불이 옮겨 붙어 아이는 옷을 벗어던지고 도망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린 사진이다.


<사진3>이한열 열사, 1987_ 이한열 열사는 민주화 시위에서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숨졌다.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6월 민주항쟁을 촉발했다.

사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분명 유의미하다. 사진은 실제적인 폭력을 가시화하지만, 보는 행위가 반드시 고통 받는 이들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대부분 사진을 보는 그 순간만 희생자를 애도하고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진은 우리를 고통의 현장으로 이끌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삶과 비극적 고통 속에 있는 삶 사이의 간극을 느끼게도 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의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사진을 보아야 한다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정의와 인권이 파괴된 장면을 목도해야 한다. 사진은 인간의 양심을 일깨운다. 사진 매체가 발전하기 전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아무리 잔혹한 일이 발생해도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다른 곳에서 얼마나 잔인한 일이 발발하는지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다. 우리는 잔인한 현실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러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을 방법은 없는지 고민한다.

물론 사진이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진 한 장이 큰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사진기자 닉 우트는 폭탄을 피해 울부짖으며 달려가는 알몸의 소녀를 사진에 담았다‘네이팜탄’. 이 사진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반전 시위의 물꼬를 열었다.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사진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불꽃처럼 일게 했다. 언제나 고통을 받은 이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건네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두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 불가능함을 너무 잘 알고 있을 때 타인의 고통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 곳곳에서는 일상적으로 잔혹한 일들, 믿을 수 없는 폭력이 자행된다. 그들의 고통을 담은 사진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전달된다. 저자의 이 말이, 귓가에 마음속에 쟁쟁 울린다. 타인의 고통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보고, 다르게 보고, 제대로 보고” 생각을 키우는 첫걸음, <유레카>가 함께 합니다. 논쟁, 독서, 시사, 인문교양, 입시… 청소년에게 필요한 정보를 <유레카>로 만나보세요. <유레카>는 한 달에 한 번 발행되는 청소년 인문교양 매거진입니다.

  • 토론의 순수성을 신뢰합니다.
  • 서로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 소통과 공감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 지식과 지혜의 조건없는 공유를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