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 - 디베이팅데이 ]

역사에 남은 정치사상가의 치열한 삶

아렌트의 저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계와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동일하지 않다. 세계는 인간들 사이에 놓여 있다.”

처음 이 문장을 보았을 때는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한번 읽은 뒤로 이 말이 내 마음을 떠난 적은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이 문장은 내 마음 안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형성하고 있다. 아렌트는 철학자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그를 ‘정치 철학자’로 부른 한 인터뷰어에게 그는 차라리 ‘정치 이론가’로 불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철학으로부터 자유로운, 깨끗한 눈으로 정치를 보고 싶어요.’ 철학과 정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다. 진리와 인간의 근원적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면에 정치의 핵심은 공존이다. 아렌트의 이런 말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를 통해서 나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영화는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길에서 남자가 납치당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납치당한 남자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나치에 부역했던 그는 독일의 패전 이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신분을 위조한 채 숨어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비밀경찰들이 그를 납치해 예루살렘으로 데려온다. 예루살렘에서 열릴 아이히만의 재판에 흥미를 가진 아렌트는 잡지 <뉴요커>에 자신이 재판에 참석하여 칼럼을 기고하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다. 편집부는 당시 이미 유명한 사상가였던 아렌트의 요청을 흔쾌히 승낙한다.

아렌트는 재판 과정을 내내 갸우뚱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우선 그녀는 아이히만이 납치되어 유대인들에게 상징적인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 것부터 의문을 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나치와 아이히만의 범죄는 ‘유대인에 대한’ 것으로 한정할 수 없는, ‘인류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좀 더 국제적인 재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증언대에 선 증인들, 유대인 생존자들은 아이히만을 질타하고, 살해당한 수백만의 유대인들의 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치 관료를 향한 유대인들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분노 탓에 재판 과정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요컨대 그곳엔 ‘개인은 있지만 역사는 없었다.’

아이히만은 아렌트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재판 과정 내내 그는 코감기에 걸려 코를 닦고,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관료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을 전개할 때마다 아렌트는 유대인 동료와 친구들에게 반발을 사야만 했다. 아이히만이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라는 아렌트의 말에 그녀의 친구 쿠르트는 말한다.

“반유대주의자가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옆에 앉아있던 남자도 거든다. “나치 당원에 친위대원인데 어떻게 반유대주의자가 아닐 수가 있어요?”
아렌트는 대답한다.
“법에 따랐을 뿐이라잖아요.” 그리고 이어 말한다. “하지만 정말 흥미롭지 않아요? 살육적인 체제가 요구한 건 뭐든 열심히 한 사람이 자기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니!”


아이히만이 악마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라면, 도대체 그는 어떻게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범죄에 가담하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렌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뉴요커에 칼럼을 전송한다. 칼럼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를 20세기 최고의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만든 것은 그 어떤 어리석음과도 일치하지 않는 사유의 부재였다.’

‘유대인이 사는 곳엔 지도자가 있었다. 이 지도층은 거의 예외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또 다양한 이유로 나치에 협력했다.
유대인들에게 이렇다 할 조직이 없고 지도자도 없었다면 혼란과 불행은 있었겠지만 희생자의 숫자가 600만까지 늘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칼럼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온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악마화 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유대인 지도자들의 책임을 지적했다. 아이히만을 물어뜯는 것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자신을 위로하려던 유대인들은 당연히 크게 반발했다.

등을 돌린 세상

아렌트와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하던 쿠르트는 아렌트의 기고문을 읽고 앓아눕는다. 쿠르트가 걱정되어 찾아온 아렌트에게 그는 묻는다.

“넌 정말 유대인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거니?”
그의 말에 아렌트는 대답한다.
“저는 그 어떤 민족도 사랑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자신에게 쏟아진 수많은 협박과 모욕 속에서도 아렌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뉴요커>의 기고문들을 묶고 개정하여 책으로 발매한다. 이것이 그녀의 가장 유명한 저서 중 하나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렌트가 가장 주목한 것은 ‘사유 능력의 상실’이라는 주제였다. 영화의 마지막 강연에서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 우리는 대개 사유는 나와 자아 사이의 침묵의 대화와 연관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아이히만은 한 개인이 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오직 하나뿐인 인간의 특징인 사유하는 능력을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죠. 이런 사유의 불가능함은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예전에 볼 수 없던 거대한 규모의 악행을 저지를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이것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칸트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라고 말한 것은 유명하다. 전체주의는 인간에게서 목적을 소거한다.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되는 순간 인간은 이데올로기 선전의 도구, 혹은 그저 숫자로 변한다.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라는 말이 무서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서류상 표기된 유대인들이 그저 숫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으로 느껴졌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이히만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의 평범함과 그의 악행을 조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이해하려고 하는 건 용서하는 것과 다릅니다.
난 이해하는 걸 의무라고 봤어요.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아렌트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그녀가 독일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세상에 필요하다는 굳은 믿음.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한나 아렌트 역을 맡은 바바라 수코바의 연기가 눈부시다. 열정 가득한 그녀의 연기 덕분에 역사적인 사상가의 삶이 픽션 속에서 생동감 넘치게 재현된다.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느낀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런 점들이 무색할 만큼 이야기 자체와 캐릭터, 그리고 수코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렌트의 말들은 시종일관 흥미로웠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네가 쓴 무엇인가를 세계로 내보내어 그것이 공공의 것이 될 때마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은 명백하다. 또 그래야만 한다. 나는 이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당신이 독립적으로 생각해온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장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그 생각을 갖고 하는 일부터 배우려 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가 남긴 말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영화를 보고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아렌트가 참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영화 <한나 아렌트>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아렌트의 치열한 고민과 생각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끝까지 이야기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세상에는 실천으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 있다. 두고두고 큰 힘이 될 것 같은 영화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0.14~1975.12.04

1906년 독일 린넨(현 하노버 일부)에서 태어난 유대인 정치 이론가. 하이데거에게 철학을 배웠고, 논문을 출판했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시대적 장벽에 가로막힌다. 이후 파리로 피신했고, 1940년 하인리히 블뤼허와 결혼했다. 1941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해 1950년 미국에 귀화한다. 1975년 겨울 사망.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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