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냐 죽음이냐

[ - 디베이팅데이 ]

‘살아 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삶에서 죽음으로…. 미망인 카담비니는 이 길을 극적으로 오갑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들려주는 카담비니 사연은 옛날 얘기처럼 흥미진진한데, 머릿속으로는 꽤 묵직한 물음이 계속 오가더군요. 나는 누구고, 나와 너는 뭐며, 살아 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철학적 물음이. 글_김지나 기자

타고르가 쓴 카담비니 이야기

봄이 오면, 삼라만산은 찬란한 시기를 맞습니다. 여린 새순과 새싹이 돋고 어여쁜 꽃들도 봉오리가 필겁니다. 삶과 죽음을 오간 주인공 카담비니의 고뇌에 찬 사연과는 대조적인 요즘입니다. 카담비니는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는, 친정 피붙이 하나 없는 혈혈단신 외로운 여인입니다. 유일한 보람이라면, 시동생의 아이를 돌보는 일. 그러던 어느 날 카담비니의 신체 기관이 멈춥니다. 장례가 치러지고, 카담비니는 사바 세계를 떠나 죽음의 세계로 옮겨갑니다. 하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신체 기관이 멈춘 게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모양인지 카담비니는 살아납니다.

자, 문제는 이제 복잡해집니다. 카담비니는 어디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요? 죽음에서 탈출해 삶의 세계로 옮겨온 카담비니는 어떤 일들을 겪게 될까요?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요, 인도의 시인이며 사상가요 교육가인 타고르. 한국을 ‘동방의 빛’이 되리라 노래한 시인 타고르가 옛 이야기하듯 들려주는 카담비니의 사연은 별다른 상징도, 긴박감도 없고, 단조롭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사바 세계로 돌아온 카담비니의 고뇌를 좇다보면 진정한 살아 있음이 무언지, 나와 타인 사이에는 어떤 존재적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게 만듭니다.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삶의 세계로 돌아온 카담비니가 겪은 최초의 난관은 이것입니다.

진정 자기는 이 세상 사바 세계의 일원은 아니었다. 진정 자기는 공포의 인물이요, 불길한 징조의 인간이요, 허깨비가 아닌가!

카담비니는 살아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이 맺어왔던 모든 인연은 끊겨져 버렸고, 따라서 ‘삶의 세계를 떠났다’고 단정합니다. 비록 몸은 살아 있지만 카담비니는 자신을 ‘자신의 허깨비’ ‘헛된 그림자’라고 자각합니다.세상과 타인과의 인연이 끊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엄연히 숨을 쉬는 살아 있는 육체를 ‘허깨비’로 인식해야 할 만큼 절대적인 것일까요?

“나는 나 자신의 허깨비다!”

어두운 화장터에서 홀연히 살아난 여인. 이것은 실로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으니까요. 잠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나라면, 내가 카담비니라면 어떨까, 하구요. 십중팔구,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처음엔 카담비니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금세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카담비니가 살았던 세계는 100여 년 전의 인도입니다. 죽음의 세계에 닿았던 카담비니를 아무렇지도 않게 환영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캄캄한 화장터에서 카담비니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자기에게는 황홀한 기적의 힘이 있고 끝없는 자유가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있었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도 있었다.

‘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독자들도 덩달아 기대해봅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는 것도 참 근사한 일이라고. 예전과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도 분명 하나의 답이 되지 않을까요? 카담비니는 이 새로운 생각을 좇아 화장터를 빠져나와 어둠 속을 끝없이 걷습니다. 그러나 금세 새로운 공포에 맞닥뜨립니다. 황량한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왕국’의 당당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빛이 번지고 현실의 세계가 펼쳐지고 나면, 아무래도 산 자들 속의 이방인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허깨비는 서로 무서워”하는 관계고, “죽음의 강의 각기 다른 둑에 살고 있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카담비니는 무서운 고뇌에 휩싸입니다. 이 대지와 또 살아 있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던 것입니다.

“타자는 나의 실존에 불가피하다”

대지, 혹은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카담비니는 답을 찾지 못하죠.친구 죠그마야를 찾아가지만 소용없습니다. 죠그마야는 남편이 있고, 제 할 일이 있고, ‘세상 사람들과 애정과 의무’를 나누며 살아가지만, 자신은 영원 속에 있는 ‘헛된 그림자’일뿐. 카담비니의 두려움은 깊어갑니다.이질감. 함께 살아가는 누구와도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 서늘한 두려움.

새로운 위험 상태가 생겨났다. 카담비니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으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카담비니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공포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독자들의 머릿속엔 어쩌면 어느 순간 카담비니의 두려움이 과장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칠 겁니다. 그렇게까지 두려운 일일까, 하는.그렇다면 이제 카담비아 안에 도사린 공포, 혹은 두려움의 정체를 따라가 보죠. 과연 그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실마리는 ‘타인’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보면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당신은 누구고, 어떤 사람입니까? 내 이름이 뭐고, 내 나이가 몇이고, 내가 하는 일이 뭐라는 사실이 곧 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선한 사람이다, 성실한 사람이다, 꼼꼼한 사람이다 등은 어떤가요?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그렇게 보았다면, 그 판단으로 이끈 동력은 어디 있나요? 아마도 나 아닌 타인이, 선하다, 성실하다고 인정해주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나 아닌 타인과 무관한 ‘나’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타인이 나를 이처럼 그 자체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군요. 조금 인문학적인 용어로 풀이하자면, 나에 대한 어떤 진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관통해 지나가야 한다는군요. 즉, 타자는 나의 실존에 불가피한 존재요,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갖는 데 불가피한 존재란 의미입니다. 카담비니는 죽음에서 삶으로 탈출해 돌아왔지만,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누구도 카담비니가 살아 있다고 ‘인식하지’ 않았으니까요. 타고르는 카담비니 얘기를 통해, 자아 안에 들어 있는 타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살아 있음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도요.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담론은 지적인 학자들과 문학가, 철학가들의 단골메뉴입니다.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너’라고 부르는 타자와의 만남과 응답을 통해서만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헤겔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은 그것이 타자의 대답과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때라야 실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대단한 지식인들의 이론이 아니라도, 타자가 없는 자아 인식이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입니다.‘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은 나와 타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속 남자는 거울을 보고 있습니다. 거울이란 흔히 ‘나’의 모습을 비추는 사물이지요. 하지만 그림 속 거울은 남자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군요. 그리고 우리는 거울을 보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거울을 타자라고 본다면, 내가 보는 거울의 뒷모습은 타자가 보는 내 모습인 셈입니다. 이 그림은, ‘나’는 타인이 바라보는 ‘나’를 볼 수 있을 뿐이라는 상징을 담고 있네요.

사랑이란 영혼의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아줌마 죽었었어?” 하고 아이는 물었다.
“그래, 아가.”
“그런데 아줌마 이젠 살아서 돌아왔어? 다시는 죽지 마.”

마지막 발걸음이 집을 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가는 발걸음. 카담비니는 아픈 엄마 대신 시동생의 아기를 사랑으로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는 카담비니를 반겨 맞아주네요. 존재와 존재를 가로막던 벽을 아이는 단숨에 걷어버립니다
.
“사랑이란 영혼의 궁극적인 진리이다.” 타고르의 명언인데요, 타고르는 어린이를 ‘신이 인간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보낸 사신’으로 보았습니다. 신의 사신은 카담비니의 절망을 걷어냅니다. 그리고 카담비니는 ‘죽음으로써 자기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입니다. 나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긴 해설을 실었지만, 사실 타고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 짤막한 명언 속에 함축돼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린 아이 덕에 카담비니는 진정한 살아 있음을 그 스스로 믿게 되었으니까요. 비록 죽음을 향해 몸을 던지지만 적어도 자신 안에 있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보이는군요.

혼자라는 것, 타자에게 내가 의미 있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우리들은 모를 겁니다. 좋은 벗과 가족이 있으니까요. 혹여 무리들 속에 동떨어진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의 공포에 공명하세요. 그럼 저절로 카담비니를 알아봐준 어린 아이의 마음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찾아들지도 모르니까요.

타고르(1861~1941)

인도의 세계적인 시인, 철학자, 극작가, 작곡가. 벵골문예부흥의 중심이었던 타고르 가의 열넷째 아들. 열한 살 무렵부터 시를 썼고, 1877년 영국에 유학해 법률을 공부하며 유럽사상과 친숙해졌다. 대표 시집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뜻. 이 시집은 벵골어로 된 157편의 서정시를 묶어 1910년에 처음 출판했다. 타고르는 여기에 57편을 추리고 다른 시를 첨가하여 모두 103편을 직접 영어로 옮겨 1912년에 영국에서 다시 출간했다. 이 시집으로 이듬해인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편 타고르는 시뿐 아니라 소설, 희곡, 평론, 작곡에도 능했다. 우리나라를 소재로 두 편의 시 <동방의 등불>과 <패자의 노래>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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