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 - 디베이팅데이 ]

70년대,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두 소년

두 아이가 있었다. 아직 포연에 휩싸이지도, 잔인하고 무분별한 악행에 휘말리지도 않았던 시절의 카불에. 카불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다. 아프가니스탄이라면 지금도 여전한 전쟁의 땅이다. 21세기 최초의 전쟁. 미국은 9·11 테러 직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잠시의 휴전기가 있긴 했지만 전쟁은 십수년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하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카불의 언덕에서는 아이들이 신나게 연을 날렸고, 어른들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흐뭇한 웃음으로 지켜보았다. 거리에서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총소리는 너무 낯설었다. 폭탄과 총소리밖에 듣지 못하고 자란 아프가니스탄의 아이들 세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가난했고, 하자라인(시아파)에 대한 파쉬툰인(수니파)의 종족 차별은 있었지만, 이후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두 아이, 아미르와 하산. 두 명의 사내 아이들은 같은 유모의 젖을 나눠 먹고 자랐다. 그렇다. 두 아이는 친구보다 더 가까운 친구였고, 형제보다 더 형제다웠다. 아미르와 하산은 카불의 언덕을 뛰어다녔다. 나무 위에 올라가 책을 읽고, 겨울이면 난로 앞에서 온종일 카드놀이를 하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흰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언청이 하산은 사람들이 멸시하는 하자라인이었고, 하인이었다. 반면에 아미르는 부유한 바바를 아버지로 둔 복 많은 아이다. 이것은 분명 둘 사이를 가르는 강력한 장벽일 수 있었지만, 소년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연을 쫓는 아이>는 아미르 잔이 카불에서 태어나 미국에 정착해 어른이 되기까지 겪은 일들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1970년대 초반부터 9·11 테러 사건 후 미국이 탈레반 통치 하의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시점까지 다룬다.) 그 일들의 우여곡절은 깊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어도 저마다 겪는 인생의 파고(波高)는 꽤 아찔한 법이다. 아미르 잔의 파고는 좀 더 높고 좀 더 위력적이다. 참으로 동화적인 제목의 이 두툼한 장편소설 안에는 동화와는 거리가 꽤 있는 끔찍한 일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아프가니스탄의 질곡 어린 역사와 관련이 깊다. <연을 쫓는 아이는>는 미국에서만 1200만부가 팔렸고,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등 전세계 51개국에 소개되어 각 나라마다 베스트셀러 정상권에 올랐으며, 2007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아미르 잔과 하산

아미르의 집은 카불 북부에 위치한 신흥 부촌. 아버지 바바와 아미르의 어른 친구가 돼주었던 바바의 친구 라힘 칸은 카펫 수출업체와 두 개의 약국, 식당 한 곳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바바는 통 큰, 기백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사회적인 관습이 막강해도 자신의 생각에 따라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무시하는 이단자이기도 했다. 부유했으나 가난한 사람들을 항시 보살폈고, 자신의 법칙이 확고한 진보주의자였다.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 자란 알리와 그의 아들 하산을 가족처럼 돌봤다. 그러나 아미르 잔은 아버지가 어렵다. 둘의 관계는 꺼칠꺼칠 매끄럽지 않다. 아미르는 자신의 출생이 아버지의 소중한 아내를 희생해서 얻은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아미르의 엄마는 아미르를 낳다 죽었다). 기질적으로도 둘은 달랐다. 아미르는 글을 읽고 이야기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섬세한 아이였던 반면에 바바는 호탕한 사내였다. 아미르는 아버지의 냉담함으로부터 벗어나 어머니의 책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하산이 있었다.

하산은 바바가 어릴 때 함께 자란 알리의 아들이요 아미르의 하인이었다. 공교롭게도 하산 역시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엄마가 집을 나가버려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다. 바바는 아미르를 키운 유모를 보내 하산에게 젖을 먹였다. 딱딱한 나무로 조각된 중국인형같이 생긴 하산. 하산은 언청이였고 멸시받은 하자라인이었고 하인이었다. 아미르가 하산을 친구라고 아이들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하산을 마치 친구처럼, 친구보다 더, 아니 형제처럼 대했다.

역사를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나는 파쉬툰인이고 하산은 하자라인이었다.
나는 수니파이고 그는 시아파였다. 그리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 사실은 바뀔 수 없었다.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이렇게 절대적인 것이었지만 역사도, 인종도, 사회도, 종교도 아미르와 하산의 관계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버렸고, 아미르는 총성과 포연에 잠식된 아프가니스탄을 바바와 단 둘이 떠난다. 낯선 미국으로. 평화로운 카불의 삶은 중단되고, 아미르와 바바의 삶을 중심으로 간단치 않은 인생의 여정들이 위험하게 펼쳐진다.

비겁의 순간, 죄의식의 덫에 걸리다

삶은 계속된다, 삶은 계속된다…누구의 삶이 해피엔딩이냐 묻는 건 어리석다. 행과 불행이 교차하고, 상실과 성취가 반복된다. 잔인한 역사의 회오리바람에 쓸리고, 잔혹한 손에 무참히 짓밟혀도,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어린 아미르의 천진한 행복은 1975년 열두 살에 멈춰버린다. 소련군(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기 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문이냐고? 그건 아니었다. 연날리기 대회에서 아미르가 우승한 날, 온전히 아버지를 차지할 수 있을 그 영광의 순간에, 연줄이 끊기듯 아미르의 행복은 툭 끊어져버렸다.
연날리기 대회는 아프가니스탄 고유의 전통놀이다. 아미르는 그 중요한 대회에서 마침내 우승한다. 그리고 아미르의 우승을 한층 도드라지게 하려는 듯 하산은 우승한 연을 잡기 위해 헌신적으로 달린다. 어느 골목, 하산은 아세프 일당과 맞닥뜨린다. 아세프는 이미 열두어 살 무렵부터 종파주의자였고 뼛속까지 악한 인간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파쉬툰인의 나라야.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우리가 진정한 아프가니스탄인이야.
이 납작코가 아니라 우리가 순수한 아프가니스탄인이란 말이야. 저애 종족이 우리 조국을 더럽히고 있어. 그들이 우리 피를 더럽히고 있어

아세프 일당은 골목에서 벼르던 하산을 성폭행한다. 하산을 찾던 아미르는 그 광경을 목격한다. 숨이 막힌다. 하산은 아미르가 위험에 들 때마다 헌신적으로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그러나, 아미르는 돌아선다. 나설 수가 없었고, 나서지 못했다. 결단을 내릴 마지막 기회. 그것은 어쩌면 아미르가 어떤 인간이 될지를 결정할 마지막 기회였다. 방금 돌아선 그 골목으로 걸어가서 하산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미르는 어렸고 약했다. 아니다. 비겁했다. 홀로 집으로 돌아왔고, 얼마 후 하산도 돌아왔지만,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던 둘의 관계는 ‘변해버렸다.’비겁의 순간은 아미르의 내면에 깊은 죄의식을 심어놓았다. 아미르는 상처로 고스란히 남은 과거의 그 일을 치유하기 위해서 몇 곱절의 위험 속으로 기어들어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아미르와 하산의 이 에피소드를 스포일러라고 하기에는 분량이 적다. 둘의 어린시절 얘기는 600쪽에 육박하는 이 굵직한 드라마의 초반에 해당된다. 중대한 다른 비밀들이 숨어 있는 탓에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도 거침없이 읽힌다.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는 깨져버리고

아미르와 하산의 관계는 봉합되지 못한다. 절대로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헤어진다. 바바는 혈육 같던 알리와 하산을 떠나보내고 소련군이 진주한 카불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다. 엄청난 부와 지위와 가문을 유지해왔던 바바였지만 그가 짓고 계획하고 싸우고 안달하고 꿈꾸었던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그의 삶의 최종적인 합계였다. 실망스러운 아들 하나와 옷 가방 두 개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아미르는 상관없었다. 비겁했던 과거로 인하여 카불은 치유 못한 상처였고, 오히려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러시아군이 쳐들어오기 훨씬 전에, 마을이 소각되고 학교가 파괴되기 훨씬 전에, 죽음의 씨앗처럼 지뢰가 설치되고 아이들이
돌무덤에 묻히기 훨씬 전에, 카불은 이미 내게 유령의 도시가 되었다. 카불은 언청이 귀신들의 도시였다.

소설은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바바와 아미르가 미국에서 힘겹게 정착하는 동안 고국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총성이 멎지 않았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목격한다. 아미르가 비겁의 순간을 헤쳐나가느라 다시 찾은 카불은, 하산을 비롯한 아프가니스탄인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소설에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알 카에다를 소탕하기 위해 탈레반 통치 하의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시점까지 다룬다. 카불에서의 어린 시절, 공화국의 건설을 목격한다(1973년). 그리고 몇 년 후(1978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이어서 소련(소비에트)이 진주한다.

이로부터 20여 년 간 아프가니탄은 끔찍한 내전을 겪는다. 소련군에 대한 반군조직들의 저항으로 시작된 아프간 내전은 89년 소련군이 철수하고, 92년 공산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일곱 개 반군 파벌끼리의 주도권 쟁탈전으로 포성이 멎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96년 9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탈레반’ 세력이 수도 카불을 점령, 실질적인 집권세력이 되었다. 탈레반 정권은 잔인무도했다. 이슬람식이라는 민족적 표어를 내세운 무력집단이었다. 유엔은 9·11 테러범으로 주목된 알 카에다를 비호해온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경제제재를 시작했다. 탈레반의 해외 금융계좌도 모두 동결하는 등 목을 죄었고, 탈레반 정권은 붕괴해 2001년 과도정부가 수립된 상태다. 위험천만한 카불로 돌아온 아미르. <연을 쫓는 아이>는 긴박한 역사에 휘둘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을 벽돌을 쌓듯 차근차근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현장에 아미르도 있었다. 그는 과연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위험천만한 카불로 가는 속죄의 여행

부당하긴 하지만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이, 때로는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 평생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 아미르.

소라야와 결혼할 뜻을 밝힌 아미르에게 바바가 한 말이다. 연날리기 대회에서 우승하던 바로 그날, 그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 아미르와 하산의 삶을 바꿔버리지 않았던가. 소라야는 또 어떤가. 철없던 한때의 방황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소라야는 아미르와 만남으로써 치유되었다. 그렇다면 아미르는…파키스탄에 사는 라힘 칸과의 한 통의 전화는 밀쳐두고 덮어두었던 과거와 대면하게 한다. 그리고 그 대면은 책을 읽은 사람들은 익히 알듯, 고되다. 상상할 수 없었던 고초가 아가리를 벌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겁한 과거로 인한 내면의 죄의식을 깨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그 시간 속으로 한 발 한 발 용감하게 들어선다. 골목길을 돌아서 하산을 구했어야 했는데, 외면했기에 이번만큼은 내가 해야 할 일들로부터, 하산으로부터, 나를 부르며 다가온 과거로부터,죄를 보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부터 멀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소년들의 아름다운 성장일기 같던 이야기는, 초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긴박감이 고조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아프가니스탄의 굴곡진 참담한 역사 탓이다. 그리고 양념이 잘 밴 고기처럼, 소설은 아미르의 성장기에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를 교묘히 버무려 놓았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소설은 속죄와 구원에 관한 비장미 넘치는 대서사시로 넘어간다. 죽음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주저하고 쭈뼛거리고 뒤로 숨어들던 아미르는 마침내 하산의 아들 소랍을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혹독하고 참담한 싸움을 겪고 나서야 아미르는 길고도 오랜 죄의식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소랍의 방문을 닫으면서 용서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싹트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용서란 요란한 깨달음의 팡파르와 함께 싹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소지품들을 모아서 짐을 꾸린 다음 한밤중에 예고 없이 조용히 빠져나갈 때 함께 싹트는 것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 개인적인 구원의 이야기로 읽히는 이 소설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질곡 어린 역사와 비극이 녹아 있다. 아미르와 하산의 서로 얽힌 삶과 운명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비극을 반영하고 있고, 주인공 아미르가 짊어지고 살았던 죄책감의 실체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민족문제, 인종문제, 종교문제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아프가니스탄인이 쓴 최초의 영어소설.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황폐한 아프간 사람들의 비극적이고도 비참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신의와 충성심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들을 통해서 사랑과 속죄, 나아가 구원에 이르는 감동을 보여줌으로써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강력한 스포일러 때문에 못 나눈 이야기가 아쉽다. 바바와 아미르, 알리와 하산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이 정말 평화를 좋아하는 걸까?… 믿을 수 없다

여기까지가 소설 얘기다. 책을 덮은 다음, 묵직한 감동을 받았음에도 날선 회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왜 인간은 인간 스스로 다른 인간에게 굴레를 씌우는 것일까? 종교의 굴레, 인종의 굴레, 차별의 굴레, 편견의 굴레…. 그 모든 전쟁의 굴레.정말로 인간은 평화를 좋아할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젓게 된다. 아니다, 인간은 오히려 분쟁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어찌 이리도 잔인한 편 가르기를 일삼으면서 그토록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같은 종족 내부에서는 빈과 부를 나누고, 종족과 종족을 나누고, 이 신을 믿는 자와 저 신을 믿는 자를 나누고, 박해한다.

아미르를 비롯한 많은 중동 사람들이 캐나다로, 미국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고, 그 속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안전한가. 중동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그들을 옥죄고 있지 않나. 테러에 맞서는 또 다른 백색 테러. 이 길고 지루한 되풀이를 끊기 위해, 우리 모두,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파쉬툰인과 하자라인

파쉬툰인인 아미르와 하자라인 하인인 하산의 관계는 아프가니스탄의 고질적인 인종 간 갈등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인 파쉬툰인과 아프가니스탄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소수의 시아파 이슬람교도인 하자라인 사이의 인종문제는 인종 청소라는 명분하에 하자라인 대량학살을 야기한다. 무고한 하산이 탈레반에게 처형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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