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디에이터-빛을 잃어가는 로마의 영광이여!

[ - 디베이팅데이 ]

영화 제목 글래디에이터(gladiator)란 검투 경기장에서 검을 들고 싸우는 사람을 말한다. 라틴어로 단검을 의미하는 글라디우스(gladius)에서 온 말이다. 실제로 고대 로마에는 검투사라는 직업이 존재했다. 노예 가운데 체격 좋고 건강한 자들을 골라 훈련을 시키고 경기장에서 싸우게 했는데, 관객들은 이를 보고 즐겼다.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되살아난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은 바로 이러한 검투사들이 경기를 벌이던 투기장(鬪技場)이었던 것. 로마제국의 혼란기를 배경으로 한 <글래디에이터>. 물론 <글래디에이터>만 보고 2세기 로마의 역사를 제대로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궁금증을 하나씩 해결해가면 실재했던 로마의 역사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200년을 이어온 팍스 로마나

기원전 6세기, 작은 도시로 시작된 로마는 약 500년에 걸쳐 전 지중해 및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고, 기원후 2세기에는 로마의 최전성기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구가하며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지배했다. 그러나 제국의 이 모든 영화는 다름 아닌 식민지 정벌을 위한 끝없는 전쟁으로 이룬 것이었다.
영화는 서기 180년 로마군의 게르마니아 정벌 전쟁으로 시작한다. 로마군은 사력을 다한 끝에 12년의 게르마니아 원정을 대승으로 마감하는데, 이때 전장의 총지휘자가 바로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이다. 막시무스는 허구의 인물이긴 하지만, 전쟁 장면은 실제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하에 벌어진 마르코만니, 콰디족과의 전투를 묘사했다. 이로써 로마제국의 통합을 방해하는 마지막 저항세력이 축출되고, 로마의 번영은 절정에 달한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코모두스가 아닌 전쟁 영웅 막시무스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한다. 이 때문에 코모두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갑자기 돌아가신 것으로 위장한다.

영화를 보면서, 제위를 아들이 아닌 제3자에게 물려주는 모습이 조금 의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이런 일은 매우 흔했다고 한다. 이른바 **5현제 시대의 황제들은 경쟁을 거친 지도자나 덕망 높은 철학자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겼다. 그래서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철인 황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 이처럼 아우렐리우스가 막시무스에게 제위를 넘기는 것은 역사적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우렐리우스는 이전 황제들과 달리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어린 코모두스에게 황제 수업을 시켰는데, 코모두스는 학업에 관심이 없었고, 무능력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고 난폭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자식을 사랑한 아우렐리우스는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실수를 범한다. 현명한 군주도 자식 앞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지는 모양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pax)는 ‘평화’라는 뜻의 라틴어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의 평화라기보다 강력한 힘에 의해 평화가 유지되는 상황을 일컫는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의 평화’를 뜻하는 말로, 로마의 힘으로 세계 평화가 유지되던 시대를 의미한다. 팍스 로마나는 BC 1세기 말 제정(帝政)을 수립한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5현제(五賢帝) 시대까지 약 200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로마 제국의 지배계급들에게는 평화의 시대였을지 모르나,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로마의 폭력과 착취가 이어진 제국주의시대였을 뿐이다. 이에 역사가들은 ‘팍스 로마나’라는 개념을 통해 어떤 패권에 의해 평화가 정착되었을 때를 가리키는 신조어들을 탄생시켰다. 예를 들어 “Pax Americana(팍스 아메리카나)” 등이 그것이다.

5현제(五賢帝, Five Good Emperors)
로마 제국의 전성시대에 잇달아 군림한 다섯 명의 명군(名君).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다섯 황제를 말한다. 이 시대에는 제위를 세습하지 않고 원로원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을 황제로 지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훌륭한 황제가 연이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5현제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경제도 번영하고 그 문화가 각지에 파급되는 등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민중의 이성을 잠재운 검투 경기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막시무스는 노예로 전락한 후 아프리카에서 검투사로 변신한다. 검투대회에서 매번 이겨 결국 가장 큰 무대인 로마 콜로세움의 검투대회에 참가한다. 영화는 검투사들의 삶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큰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검투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검투사들이 피로 뒤범벅되고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흥분하고 열광하고 있어 매우 놀랍다. 이는 요즘 사람들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시민들의 입장에선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노예란 단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 말곤 소나 말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는 이렇게 잔인한 피의 향연이 자그마치 500년이나 지속됐다. 거대한 타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은 오늘날의 웬만한 미식축구 경기장보다 규모가 더 크다. 검투사들은 이런 콜로세움을 가득 채우고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다 숨을 거뒀다. 그런데 이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는 왜 이런 잔인한 경기들이 펼쳐졌던 걸까?

로마 제국은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며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지배층의 부패와 사치 풍조 역시 만연해갔다. 이에 지배층은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두려웠다.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고 그들이 그저 평화롭다고 믿길 원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지배층이 생각해낸 것이 이른바 ‘빵과 서커스’의 도입. 그리고 의도대로 시민들은 공짜로 나눠준 빵과 무료 티켓을 들고 콜로세움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검투사 경기와 서커스, 전차 경주 등에 빠져들었다. 정치로 향해야 할 관심이 모두 검투사 경기로 쏠린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글래디에이터가 탄생하고, 그들은 시민들의 유흥을 위해 쉼 없이 목숨을 잃어갔다.

코모두스의 즉위와 로마의 쇠락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코모두스는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로마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도 그는 막시무스를 질투하고, 누나 루실라의 애정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변태적 인물로 나온다.코모두스 등극 이후 로마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유흥과 오락만을 즐겼던 코모두스가 측근들에게 거의 모든 권한을 부여한 탓이다. 코모두스를 대신해 정치를 했던 페렌니스와 클레안데르는 극악의 정치를 펼쳤다. 그리고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만은 폭동으로까지 이어져 근위대와 시민군이 격돌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코모두스는 별궁에서 수많은 미녀와 미소년들을 거느리고 갖가지 향락을 즐겼다. 또 혹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끓는 물속에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결국 코모두스로 인해 장대했던 로마는 파멸에 이르러 빛을 잃어갔다.

폭군 코모두스는 영화 엔딩 부분에서 막시무스와 검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는다. 경기 전에 막시무스에게 독이 묻은 칼을 찔러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비겁함을 서슴지 않았지만 결국 막시무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실제 역사는 이와 다르지만 영화가 역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건 사실로 보인다. 실제 코모두스는 그의 애첩 마르키아가 탄 독을 마시고 나서 근위병에게 살해당했다. 영화는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장군 출신 검투사 막시무스를 통해 로마의 쇠퇴를 은유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였고, 그 유명한 <명상록>으로 인해 후세에 누구보다도 명망이 높았던 철인왕의 어리석은 자식 사랑. 결국 그것이 대 로마 제국의 빛을 잃게 했다. <명상록>에서 보여준 삶에 대한 현명한 통찰이 코모두스에게도 투영됐더라면 역사는 달리 전개되었을까?

영화 속 진실 혹은 거짓!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들의 손에 죽었다?
철학자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는 영화에선 아들 코모두스에게 살해되지만 역사서엔 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코모두스가 14살이 되었을 때부터 정치에 관여시키는 등 아들 사랑이 대단했다. 이처럼 코모두스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할 이유는 없다. 실제 아우렐리우스는 아들에게 양위한 뒤 사망했다고 한다.

2. 누나 루실라는 로마를 위해 동생을 죽이려했다?
영화 속 루실라는 정말 아름답고 선량한 인물로 등장한다. 막시무스를 사랑하면서 마침내 로마를 위해 동생을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루실라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대단해서 처음부터 동생을 죽일 음모를 꾸몄던 야심가로 기록돼 있다. 원로원과 합심해서 동생 코모두스를 죽이려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동생에 의해 처형당했다.

3. 그라쿠스가 등장하는데 그라쿠스 형제의 그가 맞나?
루실라, 막시무스와 힘을 모아 코모두스를 제거하고자 했던 원로원의 그라쿠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그 그라쿠스 형제가 맞다. 하지만 그라쿠스는 역사대로라면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할 수 없는 인물이다.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정치가이기 때문에 시대가 맞지 않다. 리들리 스콧이 일종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라고 하니 황당하지만 이해해야 할 듯.

4. 코모두스가 죽으면서 공화정이 실현되었나?
영화에서 막시무스는 공화정 실현을 당부하며 숨을 거둔다. 그렇다면 폭군의 통치에서 벗어난 로마는 헌신적인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공화정의 시대를 맞이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다섯 달 동안 네 명의 황제가 혼란스러운 로마를 지배했고, 권력에 눈이 먼 정치가와 군인들 때문에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결코 공화정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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