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

[ - 디베이팅데이 ]

진실을 낳는 산파, 소크라테스 진리를 위해 독배를 마시다

일흔 살의 노철학자 소크라테스. 그는 터무니없는 고소로 재판정에 섰지만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마지막 순간까지 아테네 시민을 일깨우려 했다. 아테네가 위대한 철학자를 법정에 세운 이유는 뭘까? 또 죄 없는 소크라테스가 기꺼이 독배를 마신 이유는?

석수장이의 못생긴 백수 아들, 소크라테스

이름만 들어도 고리타분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근데 책 속의 소크라테스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하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친근하기 어렵지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알아주는 못생긴 사나이였다. 그를 닮았다는 말이 아주 끔찍하게 생겼다는 표현으로 쓰일 정도로. 부자도 아니지만 가난하지도 않은 석수장이의 못생긴 아들 소크라테스. 하지만 그는 대단한 현자(賢者)였다. 나중에 유명한 장군이 된 알키비아데스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눈물이 쏟아지면서 그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고 했고, 아테네에서 추방된 어떤 젊은이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여자로 변장해서 귀국했다고까지 하니, 대단하긴 대단하다. 게다가 너무 잘난 사람은 부담스러운 법인데, 소크라테스는 대단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주면서도 상대방을 편안하게 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으로 철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은 기원전 430년경, 마흔 무렵(출생은 기원전 470년)의 일이다. 당시 친구 카이레폰은 델피의 신전에서 들은 신탁을 그에게 전해준다. 신탁의 내용은 이렇다.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한다. 자신이 현명한 것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현명하다고 자신하면서 자기의 무지를 못 깨닫는 데 비해 자신은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무지(無知)의 지(知)’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지의 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신의 소임이라 여기고 ‘깨달음을 낳게 하는 산파’가 된다. 산파란 산모의 출산을 돕는 역할. 소크라테스는 이를 위해 거리며 시장 등을 쑤시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다고 무얼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저 끝없이 묻고 또 물었다. 이런 식이다. 한 아들이 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확신하는 그 아들은, 실수로 노예를 죽인 자신의 아버지를 ‘신에게 불경하다’는 이유로 법원을 찾아간다.

에우티프론: 아버님이 실수로 노예를 죽였어요. 물론 가족들은 아들인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법정에 고발할 수 있느냐고 펄펄 뛰었지요. 하지만 제 생각엔 아무리 친아버지라도 살인자는 고발하는 게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 자네가 그토록 존중하는 ‘경건함’이란 대체 뭔가?
에우티프론: 경건함은 신들이 좋아하는 일이지요.
소크라테스: 하지만 신들도 제각각 생각이 다르지 않은가? 똑같은 행동을 가지고도 어떤 신들은 좋아하고, 어떤 신들은 좋아하지 않으니 말일세.
(소크라테스의 말을 듣고 에우티프론은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고쳐 한다.)
에우티프론: 경건함은 모든 신들이 동의하여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다시 반문한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네. 그럼 경건함이란 모든 신들이 인정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이 인정한 것인가?

대화는 여기서 중단되었고, 에우티프론은 갈피를 못 잡다가 결국 법원 안으로 황급히 뛰어들어가 버렸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행동은 당시의 권력자들에게는 ‘위험한 것’이었고, 밉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다 아는 현명한 자신에게 과연 현명한지 계속 묻는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아무튼 소크라테스의 일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은지, 우리가 사는 이곳이 올바른 사회인지 묻고 다그쳤다. 권력자들의 눈에 보기에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고, 따라서 권력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입에 재갈을 물릴 계획을 세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에게 ‘이상한 논리를 펴면서 시장통에서 젊은이들을 몰고 다니며 타락시키고, 양심을 따른다며 국가가 믿는 신을 거부한다.’는 그럴듯한 죄명을 붙여 재판정에 세웠고, 사형을 언도한다.

소크라테스, 아테네 법정에서 반론을 펴다

그렇다고 일흔이나 된 노철학자를 사형시킬 것까지 있나 의문스럽다. 아테네가 왜 이 위대한 철학자에게 독배를 마시게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한 사람은 하단의 지식검색을 찬찬히 읽으면 어림해볼 수 있다. 당시의 아테네 상황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이걸로는 소크라테스 사상의 어떤 부분이 아테네 실력자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는지 알 수 없다. 시간을 들여 이 책을 꼼꼼히 읽는 도리밖에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아테네 법정에서 펼친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살짝 맛보려 한다.

그에 앞서 소크라테스가 섰던 아테네 법정에 대해 알아보자.우선 아테네 법정은 지금의 법정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법정의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따로 없었고, 유죄 여부는 배심원 투표로 결정했는데 해마다 무려 6000명의 배심원단을 뽑았다. 이들이 모두 재판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추첨으로 적게는 200명,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배심원을 다시 뽑았다. 또, 배심원의 참석률을 높이기 위해 수당을 지급했다고 한다. 민주주의의 진원지 아테네에서 돈을 받고 배심원을 했다면, 이는 약간 민주적 자질이 부족함을 말해주는 듯싶다
.
당시 법정은 시장 옆에 있었다. 야외 법정이라 소음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 501명이 모여 재판 당사자의 논쟁을 듣는다고 상상해보라. 조근조근 논리적인 변론이 제대로 들릴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라면 논리적인 변론보다는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려한 말솜씨가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재판에 이기기 위해 얄팍한 수를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진실하지 않은 화려한 논박술을 구사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재판정은 진리를 위해 토론해왔던 광장이나 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변론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아테네 시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반격_신의 사명을 다하느라 생긴 일

지금 간략하게 살펴볼 내용은 <변명>의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변론에 신을 끌어들였다. 그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에 대한 소문이 안 좋은 건 ‘신이 내린 사명을 성실히 다하느라 생긴 일’이라고 말했다.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73쪽에서 83쪽까지 다시 읽을 것)
이 얘기는 앞에서 잠깐 다룬 ‘무지의 지’에 대한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는 없다.’는 신탁의 내용을 확인하느라 그는 현명하다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저는 지혜롭다고 이름난 이와 대화해 보았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굳이 댈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나라일에 관여하는 사람, 곧 정치가였지요. 오, 아테네사람들이여! 그를 탐색하면서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현명해 보이고, 더욱이 자기 스스로도 현명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_소크라테스의 ‘변론’ 중에서

즉, 소크라테스의 판단으로는 우리 인간들 중에 누가 참으로 선하고 좋은지 알 수 없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렇지 못하면서. 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알지 못하기에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 차이 때문에 자신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소크라테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지를 깨우치게 하여 진리에 도달하도록 돕는 것이 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이렇다. 바로 이 과정에서 자신의 무지가 폭로된 것을 불쾌하게 여긴 자들의 미움과 중상을 받게 되었던 것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지혜의 겸손함을 지적한 말인 것이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명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한 일이라곤 거리를 거닐며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었을 뿐. 헌데 뭘 얼마나 대단하게 타락시켰기에 사형을 요구받게 된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가지고 고발자 멜레토스와 논박을 벌인다.(111쪽에서 113쪽을 꼭 읽어볼 것)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읽을 수 있다.

말(馬)의 경우에는 어떻소? 그대는 모든 사람들이 말을 더 낫게 만들어 주지만 해를 끼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하오? 오히려 말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이는 오직 한 사람이거나 극소수 전문가인 반면, 말과 함께 지내며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말을 망쳐 놓는 게 아니오?_소크라테스의 ‘변론’ 중에서

소크라테스는, 말에 대해 아는 자만이 말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고, 이럴 수 있는 사람은 소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바로 중우정치(이성보다 일시적 충동에 의해 좌우되는 어리석은 대중들의 정치. 고대 그리스 민주 정치의 타락한 형태를 이르던 말로 민주 정치를 멸시하는 뜻으로 쓰임)나 포퓰리즘(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 포퓰리즘을 이끌어가는 정치 지도자들은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고 겉모양만 보기 좋은 개혁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에 대한 지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의 메카 아테네 민주정은 당시 추첨과 순번에 따라 정치를 맡기고, 다수의 의견을 모아 정무를 결정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 대화를 통해 군중이 주도하는 이와 같은 민주주의를 어리석은 통치(중우정치)라고 깎아내리곤 했다. 또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지니고 있는 포퓰리즘이라는 치명적 결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위에서 말했듯 어리석은 다수를 따르기보다 정말 현명하고 정의로운 자를 따르는 사회가 더 완벽하고 올바르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테네의 권력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체제 위협적이었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사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항한 투사’이다. 그는 아테네를 몰락시킨 주범으로 민주주의를 꼽았다.(<변명>의 주제를 ‘민주주의 비판’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이다.) _<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 중에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만나는 일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 벅찰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변론’은 법정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변론이 아닌,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조금 뒤로 미루고, 소크라테스라는 멋진 철학자를 만난 것에 의의를 둬야 할 것 같다.
욕심나는 친구들은 꼼꼼히 정독해보기를 소망한다.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울 당시의 아테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을 일으켜(펠로폰네소스)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거의 30년 남짓 전쟁을 치렀던 것. 전쟁이 길어지자 아테네 민주정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사람들은 전란에 시달렸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서 권력에 눈이 먼 선동가들이 날뛰었다. 당시에는 소피스트들이 사회의 지적인 풍토를 이끌었는데, 소크라테스는 겉으로 보면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근본부터 달랐다. 소피스트들은 정치가에게 아첨하며 따랐지만, 소크라테스는 무지와 탐욕에 빠진 권력층과 기득권 지식층을 향해 예리한 비판을 휘둘렀다. 따라서 기득권층의 눈에 소크라테스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소크라테스 추종자 중에는 참주정의 핵심인물 크리티아스도 있었고,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간 알키바이데스도 있었다. 또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라 여기고 그의 대화법 기술만 익혀 다른 이들을 골탕 먹이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부잣집 자제들도 있었다.
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난다. 아테네는 민주정과 과두정이 번갈아 이어지는 정변이 지속되었고, 전쟁에 지면서 아테네는 친스파르타인들에 의한 30인 참주정이 시작됐다. 소크라테스의 추종자 크리티아스는 핵심인물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402년, 이 참주정치는 혁명군에 의해 타도되고 민주정이 부활된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그는 공포정치 핵심인물의 스승이지 않던가. 더군다나 그의 말과 행동에는 민주정치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결국 새로운 집권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소크라테스를 희생양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유력한 정치인 중 인기가 높은 아니토스는 멜레토스라는 젊은 시인을 내세워 소크라테스를 재판에 내몰았다.

discussion

1. 소크라테스는 평생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은 ‘자신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현자가 돌 수 있었지요. 무지를 자각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인지 말해봅시다.

2.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와의 논박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어리석은 다수를 따르기보다 현명하고 정의로운 자를 따르는 사회가 더 올바르다고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찬반으로 나누어 토론해봅시다.

3. 소크라테스는 의도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변론을 했습니다. 형을 선고 받은 이후에도 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고 국외로 탈출하라는 제안도 거부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택한 의미를 정리해보고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자세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설명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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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inions

  1. 이자구의 프로필
    이자구 님의 의견 - 2년 전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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