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페이지 게시판 커뮤니티 자유게시판 중등 과학 탐구 토론 대회에 대해서 ‘중등 과학 탐구 토론 대회에 대해서’에 답변달기

#11467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서양중세사의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이 책을 접하였을 때 “에이, 이거 얇네, 쉽겠군.” 이라고 생각하고 이걸 골라들었다. 연옥의 탄생에 원래 흥미가 있었지만 일요일날 다 읽기에는 좀 벅차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걸 선택하게 되었고 집에 돌아와서 이것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얇다고 해서 만만히 볼 게 아니라는 거였다. 이 책은. 현재 3번 정독을 하고 이 레포트를 작성중이지만 3장의 내용은 여전히 어렵다. 교수님이 설명해 주시지 않은 부분이서서 일까. 아니면 공대쪽, 즉 기계 관련이라 그럴까. 1장과 2장의 내용은 수업 초기에 봉건제가 등장할 무렵의 수업시간대에 교수님이 설명해 주신 내용이 들어가 있었기에 복습한다는 심정으로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 파트는 기사와 봉건제를, 두 번째는 중세 초기의 농업혁명을, 세 번째는 기계동력과 장치에 대한 것인데, 세 번째가 본인에겐 가장 난해하였다. 이 책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인용이 된다고 교수님께서 그러셨었는데 이 책을 읽어가면서 “어! 이거 어디서 봤는데!” 라고 말이 튀어 나오는게 몇 번 있었다. 그럼, 이 세가지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제1장 등자. 기마 충격전, 봉건제, 기사
이 장에서는 등자, 그리고 말을 위주로 하여 봉건제를 다루고 있다. 기병에서 기사로 그리고 말을 이용한 전투를 통해서 봉건제를 연관시키고 있다. 처음에는 말을 전차에 이용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에서는 말을 타고 무릎을 말에 밀착시켰다. 3번째 에서는 등자를 갖추고 말을 타게 된다. 말을 탄 사람은 보병보다 유리했고 이를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 개량된 것은 광범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등자가 없을 때의 기수는 어깨와 이두박근의 힘으로만 충격을 가해야 했지만 등자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자신의 몸무게와 말의 체중을 합쳐서 훨씬 더 강한 타격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즏 등자가 생김으로서 인간의 에너지를 축력으로 대치시켰고 마침내, 혁명적인 전투법인 기마 충격전이 사용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1. 봉건제의 기원에 관한 이론과 그 비판
봉건제의 시작은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 책에서는 보고 있다. 기병이 나오기 전의 프랑크 왕국의 군대의 주력은 보병이었다. 이들은 프란키스카라는 보병 특화 무기였다고 한다. 이러한 군으로 이슬람 군이 침공하여 벌어진 전투인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패배해 도망가는 이슬람 군을 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군대가 기동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텔은 적절한 기병을 양성하기로 하고 교회령을 몰수하여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였다. 이 책에서는 이슬람 군의 침공이 봉건제를 탄생시킨 위기였고, 이렇게 탄생한 봉건제를 폭발적으로 확대시킨 사건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침공이 봉건제의 확립을 야기한게 아니라고 글 말미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를 여기에 설명하였는데 마르텔이 개혁한 그것들은 푸에티에 전투가 일어나기 1년 전부터 해왔던 것들이었고, 그 당시의 이슬람 군의 주력은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다고 한다. 이슬람군의 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주력이 보병에서 기병으로 변화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이슬람의 침공이 샤를 마르텔의 개혁을 축발한 것이 아니었고 봉건제의 확립을 야기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등자의 기원과 전파
등자는 고대 근동아만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의 기원은 인도에서 나온 가르츠, 즉 엄지발가락 등자라는 것인데 이것이 중국으로 전파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발을 걸치는 등자가 나오게 되었다고 이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 때가 5세기 초이고 같은 시기에 조선으로 등자가 전파되었고 6세기에는 일본으로도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인들은 694년에 페르시아 인들로부터 등자를 획득하였고 그리고 등자는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3. 기마 충격전과 봉건적 생활의 성격
중세 유럽의 봉건 계급은 등자에 의해 가능해진 특수한 전투법을 실행하는 기사들이었다. 이들을 위해서 마르탱 같은 이들은 그들이 기사로서 봉사 한다는 조건으로 교회령을 몰수하여 그걸 다시 그들에게 재분배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법은 많은 비용이 들었는데 말은 비쌌고, 무장은 갈수록 무거워져 갔기 때문이다.
기마 충격전은 기사계급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가 봉토를 보유하는 것이 원칙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새로운 전투법은 장기간의 전투 훈련을 받고 신체조건도 매우 뛰어나야 하였기에 보통의 일반인들은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또 이러한 전투법을 갈고 닦기 위하여 마상시합-토너먼트-라는 것이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기마 충격전의 위력이 증가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위해 무장이 점차 무거워졌고 얼굴 보호대를 쓰게 됨에 따라 누가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어떠한 방법이 강구되었고 그것은 상속받은 무기가 그의 신원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등자만큼 단순한 발명도 드물지만 등자만큼 역사에 그렇게 촉매작용을 한 발명도 드물다. 등자로 인해 새로운 전투법(기마 충격전)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러한 전문화된 방법에 의해 싸울 수 있게 토지를 받은 기사 귀족이 지배하는 서유럽 사회가 등장했다. 등자는 사람과 군마를 결합하여 전투 유기체로 만들었다. 고대인들은 반인반마 켄타우로스를 상상했다. 중세 초에는 그런 사람이 유럽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때 중세 초의 봉건제는 기사에, 기사의, 기사를 통한 제도였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새로운 전투법인 기마 충격전에 의해 기사 귀족이 등장하였고 등자가 있어서 이것이 성립되었다. 뭔가 간단해 보이는 내용이지만 주석도 많고 좀 더 찾아봐야할게 더 많다. 현재로서는 부분부분만 이해가 가능할 뿐이지 전체적인 흐름이 보이지가 않는다.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일까, 그래도 세 파트중 가장 많은 이해가 된 부분이기도 하다.
제2장 중세 초기의 농업 혁명
1. 쟁기와 장원제도
이 파트에서 보이는 것은 쟁기의 변화인데 쟁기는 인력 이외의 동력을 농업에 이용한 최초의 도구였다. 쟁기는 무거운 쟁기와 가벼운 쟁기로 구분되는데 이런 쟁기는 두 가지로 책에서는 나누고 있다.
먼저 가벼운 쟁기는 긁는 쟁기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무거운 쟁기가 도입되기 전부터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거운 쟁기는 중세의 유럽에 들어오면서 많은 변화를 낳았는데 먼저 흙을 철저하게 분쇄하기 때문에 십자형 쟁기질을 할 필요가 없다. 즉 농민의 노동력 절약을 의미한다. 이로서 농민 일인당 경작 면적이 확대되었다. 두 번째로는 경작지의 형태가 폭이 좁은 정방형에서 장방형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쟁기의 사용으로 인해 소가 직선으로 움직이는 거리를 길게 하고 방향을 바꾸는 작업을 줄여 작업효율을 높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무거운 쟁기는 소 8마리가 필요 하였기에 필히 농민들 여럿이 힘을 합쳐야 하였다. 그 결과 여럿이서 소와 쟁기를 관리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면서 경작 형태는 개방 경지제와 공동 경작이 실시되었다. 이를 ‘장원 경제’라고 칭하였다.
2. 말의 이용
이 시기의 사람들은 말을 경작에 이용하기 전까진 소를 이용하였는데 그것은 중세의 소는 현대의 소보다 크고 힘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세의 말은 현대의 말보다 작고 힘이 약했지만 말의 스피드가 월등히 빨랐다. 이런 말은 소보다 지구력도 강했다. 그리하여 농업에서도 소를 대신하여 말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말이 소보다 훨씬 많은 사료를 먹을 뿐만 아니라 늙은 소는 가죽과 고기로서 유용하였지만 말은 가죽 외에는 쓸모가 없었다.말의 농업에서 이용은 북유럽에서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답은 새로운 윤작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윤작제는, 무거운 쟁기 및 경작에 말을 이용하는 것과 결합되어, 새롭고 더욱 생산적인 북유럽 농업 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또한 말을 이용하고 나서부터는 활동 반경이 넓어져서 거주지의 재배치를 결정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규모 촌락이 사라지고 공동경작을 위한 ‘집촌화’현상을 낳았다. 이러한 대규모 촌락은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농촌적이었으나 건축과 생활양식에서는 놀랄만큼 도시적이었다.
3. 삼포 윤작제와 영양의 개선
삼포 윤작제는 ‘중세 서유럽 최대의 농업 혁신’이라고 불려 왔다. 삼포제는 그 시대에 실시되고 있던 이포제에 비해 경작 면적은 3분의1정도 더 늘릴 수 있었다.이것의 장점은 네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생산성의 증가, 두 번째는 노동력의 좀 더 균등한 배분, 세 번째는 기근의 위험성 감소, 네 번째로 귀리의 생산 증진이라 볼 수 있다.
삼포제의 확산은 800년 조금 전에 시작된 후 수 세기가 걸렸다. 이런 삼포제에 의해 귀리의 공급이 증가 되었고 이는 말의 사료증가로 말을 이용이 증가하였고, 즉 말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개선된 농법에 의해서 생산된 더 많은 양의 식량만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음식 공급이 적어도 북유럽에서 이 시대를 활기차게 하였고, 생산성 증가로 인해 인구급증, 도시성장과 증가, 공업생산 발전, 상업의 확대 등을 설명한다
위의 이러한 점들은 중세 초기의 농업 혁명에 들어간다. 무거운 쟁기, 현대적 마구, 개방 경지제, 말의 이용, 삼포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들은 이미 고등학생때 배웠던 것이기에 그 만큼 이해하기에는 어렵지 않은 듯 하다.
제3장 기계 동력과 장치에 대한 중세의 탐구
개인적으로 가장 난해하고 졸리운 구간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사실 크랭크, 회전, 피스톤 등등등 공대에서나 쓰일 말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온다. 이 파트에서는 말이다.
1. 동력원
이미 헬레니즘 시대에 캠 만아니라 톱니바퀴의 기본형(별모양, 관모양, 나선모양)이 발명되었다. 기원전 1세기가 되면 상당히 정교한 톱니기구가 제작되었다. 이런 점에 미루어 볼 때 재능있는 기술자들의 동력원 개발에 진전을 못 이룬점은 무척 아쉽다.
최초의 동력원(수력)을 이용한 횡형 물레방아의 원형은 바바리안이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기원전 31년 유사한 횡형 물레방아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동력 기계가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한 사실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어떤 곳에서 물레방아가 전파되었음을 시사한다. 물레방아가 처음 출현한 후 1000여년 이 지나서야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수력의 전파라는 점에서 보면 정체의 시기가 아니었다. 즉 11세기 전 유럽인들은 주요 동력의 하나인 수력을 일상 생활에서 접하고 있으며 수력의 중요성을 점차 인식하고 있었다. 11세기에 수력이외의 동력원에도 관심을 보이는데 바로 조력이다. 즉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물레방아가 그것이다. 하지만 조수는 계절에 따라 그 변동 폭이 컸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수 물레방아의 발명은 앞으로 등장할 동력원의(기계) 전조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또 다른 동력원중 하나가 풍력이다. 풍차는 이런 풍력을 이용한 기계인데 풍차의 연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국에는 13세기 말이 되어서야 풍타가 등장하고 10세기 초에 아프카니스탄에서 분명히 존재하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서구에서 최초의 확실한 풍차는 1185년 오크셔에 있는 위들리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풍차는 겨울이면 멈추는 물레방아와 달리 겨울에도 멈추어 서지 않았다.
새로운 동력원에 대한 탐구 – 즉,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탐구적 태도를 검토하는 것에 의해 중세 유럽은 주로 근대에 문화적으로 유용하게 이용된 다른 동력원을 발견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13세기 초에는 물을 증발시켜 증기를 만드는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15세기에는 소형 터빈을 연결하고 톱니바퀴로 연결하여 불꼬챙이를 회전시켰다. 이것은 자동차의 모태가 되었다.
공기총과 관련하여 기체의 압력을 연구한 결과는 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동력에 대한 관심은 화약의 폭발력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고 전투 뿐만 아니라 17세기에 내연기관으로서 포탄대신 피스톤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행해졌다. 수력, 풍력 그리고 가스와 증기가 팽창한 때 발생하는 에너지 등이 중세 후기 기술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그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3-2 기계 설계의 발전
크랭크는 연속적 회전운동을 왕복운동으로,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꿔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바퀴다음으로 중요한 장치이다. 그 기원은 중국에서 2세기말 탈곡한 쌀을 크랭크가 부착된 회전부채로 키질하는 농기구로 처음 사용되었다. 크랭크 기구는 그 발명이 늦었다는 점에서 혹은 중국에서 도입이 늦었다는 점에서 특이할 뿐만 아니라, 발명되고 나서도 기술적 고안에 이용되는데 많이 늦었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크랭크의 새로운 유형은 15세기말경 유럽에서 발견된 조속기이다. 구와 체인으로 된 소형 조속기가 그 주변에 장착되어 회전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디딤판은 크랭크 및 플라이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기계 설계의 점진적 정교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욱 중요한 것은 물레였다. 물레는 1280년경 스파이어의 길드 규약에서 나타나며, 원산지는 인도로 알려져 있고 인도와 중국에서의 출현 시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기계설계의 혁명은 전기에너지가 이용되기 위해 다른 부가 장치가 필요할 때까지 기술상으로 기본 원리를 발견하기보다는 4세기 이전 동안 확립된 원리를 정교화 하고 세련되게 하는 데 전념한 시기였다.
3-3 동력 기술의 개념
자연의 에너지와 그것을 인간의 목적에 적용하려는 의식적이고 일반화된 열의가 나타난 징후는, 13세기에 유럽이 12세기에 인도에서 비롯된 영구 운동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인도에서의 영구운동 개념은 만물은 윤회하면서 스스로 영속한다는 힌두교의 관념과 전적으로 일치하고 이런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13세기에 서유럽은, 풍력과 수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항상적으로 작동하는 두 가지 힘은 중력과 자력을 발견했다.
중세의 엔지니어들은 기계력을 일반화하기 시작하고, 우주를 인간의 의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보고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망상과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서유럽세계의 동력 기술은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면서..
이렇게 요약해보면서 역시 책 한권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얇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안에 든 내용은 생각만큼 적지 않았다. 예상외로 많이 컸다. 하지만 많은 도움이 된것 같다. 교수님이 가르쳐주신 부분들은 이것을 여러번 읽어보면서 확실한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선택한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 책을 ‘일반일도 즐겁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가볍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 같았고, 반면에 객관적으로 고증학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기존의 이론에 좀더 심층적으로 접근하였으며 같은 사회현상에도 여러 다른 의문점을 제시하여 새로운 각도로 접근한 점은 정보화시대에 넘쳐나는 기존의 중세 시대의 기술과 사회변화를 다룬 책과는 확실히 차별화되고 질적으로 양질의 도서인 것 같다.
가장 어려웠던 3장, 그 부분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지만 역시나 인문계열인 나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기계를 좋아하지만 이런 전문적인 이야기는 질색팔색이라, 어쩔 수 없나 보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중세사회의 기술과 그 변화를 알게 해준 것 뿐만 아니라 동력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점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할수 있을것 같다.

  • 토론의 순수성을 신뢰합니다.
  • 서로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 소통과 공감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 지식과 지혜의 조건없는 공유를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