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페이지 게시판 커뮤니티 이슈토론 인간은 왜 인간을 도와야 하나? ‘인간은 왜 인간을 도와야 하나?’에 답변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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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

아주 명료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저로써는 매우 감사할 따름입니다 ㅎㅎ

“현대 인간은 생태계 입장에서는 ‘절대악’ 이고, 심지어 인간 스스로에게조차 (나에게 도움이 되는 극소수의 인간을 제외하곤) ‘악’ 한데, 어째서 우리는 꿀벌의 죽음보다 인간의 죽음에 더 슬퍼해야 하는가?”

정리1: 인간이 생태계에 대해 설령 절대악이라고 가정할지라도, 이를 통해 생태계가 인간에 대해 절대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생태계가 현대인류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고려해볼때, 인류의 생존을 최우선가치로 삼는 사람(A)에게 있어 ‘생태계에 악영향을 주는’ 인간들(B)은 그 사람(A)에게 있어 악인(B)일 것입니다.

정리2: 꿀벌이 생태계에 있어 절대선이라고 가정한다면 답변1의 사람(A)은 꿀벌이 생태계에 도움이 되기에, 이어서 인류의 생존에게 있어 유리한 작용을 하기에 모든 꿀벌은 선하다고 할 것입니다.

답변1: 위의 두 답변을 토대로 판단해본다면 언뜻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고 선인(혹은 선봉善蜂)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것이 당연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판단은 예를 들자면 부모가 집을 비운사이 벽에다 낙서를 한 아이가 집을 더럽힌 죄로 사형을 언도받아야 한다는것과 마찬가지인 판단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구에 발딛고 살아가는 동물들 중에서 자립이 가장 느린건 인간이라고들 합니다. 가령 당장 한국에서 스스로의 결정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최소한의 연령은 만19세 입니다. 이와 다르게 개는 6개월이면 성견으로 취급받고, 금붕어도 1년이면 모어(母魚)의 역할을 해낼 수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에서 성체(成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것이 가장 더딘 족속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국가가 생겼고, 현대국가는 그 국민들을 교육할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국민들에게 있어 교육은 의무이자 권리가 되었지요.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교육의 목적은 결국 국가가 순조롭게 기능하는것에 국한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교육과 양육이라는 것은 그 학생이 인간 성체가 되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사자나 독수리가 새끼를 기르는 것과 별 다를바가 없습니다. 원시인류는 사자나 독수리같은 양육방식을 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류의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한, 즉 생존을 위해서는 현대의 교육이 필요하겠지요.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서, 그리고 질문하신 내용의 전제들에 하나의 조건만 추가한다면 아래의 문장들이 성립됩니다.

(추가조건1) 생태계의 보존은 현대인류의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위 조건을 삽입하는 것에는 충분히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문장1. 인간에게 있어 교육은 현대사회에서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성인이 되기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문장2. 교육받지 못한 사람은, 즉 생존에 필요한 판단을 스스로 내릴 수 없는 사람은 성인이 아니다.

문장3.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람은 따라서 스스로의 생존에 불리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정리3. 그러므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람은 미성인이므로 교육을 통해 스스로 생존에 유리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성인이 되어야한다.

즉 전제속의 현대인류는 추가조건 하나 덕분에 악인이 아닐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찾게 된 셈입니다 ^^;

이제 이들은 정리1,2의 A에게 있어 죽어 없어져야할 악인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지도받아야 할 학생이 됐습니다. 짝짝짝!

게다가 그 배움의 성과에 따라 오히려 A이상으로 생태계의 보존과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즉 인류의 생존에 더 도움이 되는 존재로 거듭날 여지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느낄 감정은 우리가 그 재주를 못다 피우고 요절한 이들을 생각해볼때 떠오르는 그 감정과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슬픔과 깊은 아쉬움 이겠지요.

꿀벌과 인간의 죽음을 저울질 했을때 왜 인간쪽의 죽음을 더 슬퍼해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같은 맥락에서, 어째서 우리는 세월호 학생 100명의 죽음을, 꿀벌 100마리의 집단폐사보다 더 슬퍼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한꺼번에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우선 위키백과의 이 문서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C%9B%94%ED%98%B8_%EC%B9%A8%EB%AA%B0_%EC%82%AC%EA%B3%A0%EC%9D%98_%EC%B1%85%EC%9E%84

위의 내용에 대해 다소 편향되었다고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에 대한 합당한 비판이 제기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수순일줄로 압니다.

이제 꿀벌의 죽음과 세월호 학생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깊이’를 논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감성적으로 판단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월호 학생들의 죽음에 더 슬퍼할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감정이입은 그 타자와 타자로 인해 해당 감정을 느끼는 본인간의 공통점이 많을수록 더 커지기 마련이니까요. 확실히 인간인 우리는 꿀벌보다야 똑같은 인간에게서 그 공통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테지요. 다만 제가 받은 교육으로 감성에 기반한 판단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심리학자라면 슬픔에 대해 감정이입 이상으로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제 지식이 얕아 당장 지금은 ‘감정이입’ 이 이상의 말씀을 드리기 힘들군요.

이성적으로 판단해본다면 결국 이 역시도 ‘생존’이라는 정언명령의 아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는 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침몰의 원인을 제공한 청해진해운과 유병언, 해수부, 구조에 앞서 그들의 이윤을 앞세워 어쩌면 생존할 수도 있었던 희생자들을 만들어낸 언딘 등은 희생자들에게 있어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희생자들도 유가족들도 아닌 대다수에게 있어서 이들은 현재 악이라고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잠재적으로 볼때 그들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잠재적 악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청해진해운이 운항하는 배에 탑승하진 않으려고 하겠지요.

인간이 인간을 돕는 이유는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침몰사고와 비슷한 인재(人災)가 더 이상 재현되지 않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도 생태계의 보존 못지않게 우리의 생존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성인으로서의 역할이겠지요.

그러나 꿀벌과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깊이를 저울질하자니 다시금 저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감정적으로 제 자신은 응당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에 더 큰 슬픔과 분노를 느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제가 만들어낸 ‘생존론’의 감옥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꿀벌 100마리와 세월호 희생자100명중 그 누가 더 인류의 생존에 더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의문은 그들의 기여를 정량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제게 없기에 도저히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ㅠㅠ

뭔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할것 같은데 이건 좀 더 시간을 많이 두고 고민해봐야 할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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