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 - 디베이팅데이 ]

이터널 선샤인 1 copy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사랑과 추억, 이 둘은 같이 다니는 게 확실하다. 그런데 만약 이 둘의 필요충분조건을 따진다면, 굳이 없어도 되는 쪽을 정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 영화는 ‘소심한 남자와 자유분방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기억 삭제’라는 독특한 SF적 상상력을 가미해 새롭게 포장했다. 덕분에 닳고 닳은 사랑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남는 사랑’이라는 좀 더 깊은 이야기로 나아간다.

1년 열두 달 아무 변화 없이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이 남자, 조엘.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빠듯한 시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125번지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일상의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는 하루가 반복되려던 때, 반대편에서 몬타우크 행 기차의 출발 신호가 떨어진다. 소심한 듯 보이는 한 남자는, 어찌된 일인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반대편 레일을 향해 저돌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몬타우크 행 기차에 간신히 몸을 밀어 넣은 조엘. 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 “이유는 모른다. 그다지 충동적인 스타일은 아닌데….”

그날 조엘은 아무 이유 없이 회사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는 왜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게 익숙한 삶의 회로를 이탈한 것일까? 전날 밤 그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탈의 여정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혼자다. 혼자 바다를 걷고, 혼자 차를 마시고, 혼자 사색에 젖는다. 마음은 간절히 새로운 사랑을 원하지만, 그는 모르는 여자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겁내는 소심한 남자다.

이터널 선샤인 2

몬타우크의 겨울은 춥고 을씨년스럽다. 그는 낡은 일기장을 뒤적거리다 찢어진 페이지를 발견한다. 카페에 앉아 2년 만에 처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가끔 반대편에 앉은 여자를 훔쳐본다. 오렌지색 후드 점퍼를 입고 파란색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인 그녀는 커피에 알코올을 몰래 섞어 마시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그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 자유와 일탈을 목숨처럼 아낄 것 같은 여자다.

‘클레멘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그에게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클레멘타인은 5년째 반디 앤 노블 서점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록빌 센터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서점에 한 번쯤 가지 않았을 리 없다. 주뼛거리는 남자와 저돌적인 여자의 사랑은 예정된 수순을 향해 나아간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곧 사랑을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때는 발렌타인데이 하루 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시간이다.

이터널 선샤인 5 copy

기억, 지워드립니다.

꽁꽁 언 찰스 강에서 별자리를 들여다보며 로맨틱한 밤을 보낸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막 한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다. 조엘은 자동차에 앉아 칫솔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간 클레멘타인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이때 누군가가 불안한 표정으로 창문을 두드린다. “괜찮으세요?” 뭐가 괜찮으냐는 것인지 알 길 없는 조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뭐가요?” 젊은 남자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말한다. “뭐 도와드릴 일이 없나 해서요. 그런데 어떻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거죠?”

다음 날 선물을 들고 서점으로 향한 조엘은 자신을 처음 본 것처럼 낯설어 하는 그녀에게 큰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그녀는 조엘 앞에서 버젓이 어제의 젊은 남자와 키스를 하며 사랑을 속삭인다. 알고 보니 그때 차 창문을 두드렸던 그 남자는 지난 발렌타인데이에 그에게서 클레멘타인을 빼앗아간 사람. 이게 대체 무슨 일? 조금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는 큰 문제없이 잘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데 그녀는 이날 그를 생전 처음 본 것처럼 낯설게 대한다. 그녀는 과연 그녀를 잊어버린 척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짜 잊어버린 것일까? 모호한 질문을 끌어 앉은 채 절망하고 있는 조엘에게 하나의 단서가 포착된다.

친구 부부에게 보내진 한 장의 엽서. 그 안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클레멘타인 크루친스키 양은 조엘 배리쉬에 관한 기억을 삭제했습니다. 라쿠나 주식회사 보냄.”

그러니까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기억을 잊은 척한 게 아니라, 진짜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원해서. 기억이 없으니, 사랑도 있을 리 없다. 그들의 사랑은 ‘기억 삭제’라는 간단한 뇌 조작을 통해 완벽하게 소멸되었다. 기억을 잃은 두 사람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기억을 삭제한 클레멘타인은 사랑의 상처를 극복했지만 기억을 미처 지우지 못한 조엘은 여전히 지독한 상처의 늪을 헤매고 있다.

두 사람의 어긋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조엘 역시 기억을 완전히 삭제하는 것뿐. 시간의 흐름을 통해 아픔을 극복하기엔 조엘의 상처가 너무 크다. 라쿠나 주식회사의 문을 두드린 조엘은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의 기억도 삭제하기로 마음먹는다. 기억을 삭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모조리 수집해 올 것. 라쿠나 주식회사의 미에즈윅 박사는 이 물건들에 반응하는 조엘의 머릿속 회로를 탐색함으로써 ‘지워야 할 기억’을 추출해낸다. 시간은 하룻밤으로 충분하다. 조엘은 자고 일어나면 클레멘타인에 관한 기억을 말끔히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어떤 아픔도 없이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아픔이 없는 대신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도 없다. 클릭, 삭제. 상처 제거. 라쿠나 주식회사의 주장처럼, 기억은 이렇듯 간단하게 소멸되고 삭제될 수 있는 것일까?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하지 않는 사람 사이의 혼란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자문자답_ “맘대로 만들거나 지울 수 없는 사랑”

그런데 잠깐, 추억은 기쁨과 슬픔이 모여 만드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슬픈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마냥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잠시 지독한 아픔을 겪을지라도, 사랑과 아픔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행복한 건 아닐까?

조엘은 기억을 지우는 도중, 그것이 지워지지도 않으며, 지워져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헤어짐과 그로 인한 아픔도 결국엔 사랑의 하나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클레멘타인을 머나먼 장기 기억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장기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지워지는 속도도 느려질 테니.

뿐만 아니라 영화는 스스로 던진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애초에 기억을 지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가능성도 생기지 않느냐고. 영화 속 기억을 지운 또 다른 커플, 두 주인공의 기억 삭제를 도와준 라쿠나 주식회사의 미에즈윅 박사와 그의 여조수 매리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두 사람은 한때 사랑했던 사이였으나, 매리는 유부남과의 사랑을 힘겨워하고 미에즈윅 박사는 그녀의 기억을 완벽하게 삭제해 준다. 그런데 기억을 지운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에즈윅 박사에게 또다시 사랑을 느낀다.

이터널 선샤인 7

영화는 기억을 지워도 사랑은 영원히 반복되는, 불멸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여러분도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의 몫이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니체의 명언까지 동원하며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했지만, 당신이 익히 경험해온 사랑은, 앞으로 경험하게 될 사랑은 조금 불완전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에 의해 쉽게 지워지는 망각의 사랑. 아주 낭만적인 이야기를 독창적인 추리 기법으로 풀어내는 <이터널 선샤인>은 판타지라는 장르 안에 몸을 숨긴 채, 사랑에 관한 대답을 관객의 몫으로 슬쩍 돌려놓는다.

Discussion

1 사랑은 영원히 반복되는 불멸의 감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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